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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보름 덧글 0 | 조회 15,298 | 2009-04-17 00:00:00
정동철  


- 대보름 -
1981~85 사이의 발표된 글

한강 인도교를 노량진 쪽으로 건너서자마자 바른편으로 돌아 강둑 아래 얼어붙은 바닥을 향해 미끌미끌 내려가는 길은 참으로 신났다. 어둠이 횃불을 솜사탕처럼 삼키며 사람들의 어깨 위에 무겁게 깔려오는 정월 대보름, 적외선 장면을 비집고 미끌미끌 발걸음들이 뒤뚱거릴 때 거기 이상한 흥분이 가슴팍을 파고들었다.(주-1)
어머니의 성화를 아랑곳하지 않고 냉큼 얼음 위로 뛰어 올라섰다. 커다란 얼음 배에 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도대체 이 얼음의 두께가 얼마나 되는 것인지 그것이 궁금했다.
적어도 내 키만큼은 얼었겠지, 그러니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올라타도 끄떡도 하지 않을 거야, 흔들리지도 않고 금가는 소리도 없지 않아, 정말 신기하구나
그러나 얼음의 두께는 크지 않았다. 실망했다. 의문이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미리 뚫어놓은 얼음 구멍 속을 막대로 찔러봤다. 내심 그렇게 얇을 리가 없을 것이라 확인할 심사로 몇 번이고 그렇게 했다. 뭔가 크게 잘못된 느낌만이 번번이 이상스럽게 확인됐다.
이상한 것은 두껍지 못한 얼음만이 아니었다. 용왕이 있으리라는 점이 전연 실감나지 않았다. 그 의구심 때문에 어머니가 고기밥을 넣어 주는 것엔 관심을 가질 수가 없었다. 정성을 다 하시어 만들어온 조밥을 두 손 모아 얼음 구멍에 넣고는 우리 집 식구 한사람 한사람의 이름 따라 간절한 염원(念願)의 치성을 귓전에 흘리며 내내 얼음과 용왕에 대한 의문만 머리 속에 굴리고 있었다.
<정월 대보름>, 그것은 보통 이런 정도의 기억으로 나의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대보름이란 차디찬 달 속에 떠오르는 어머니의 잣불이 다시 그날 밤으로 이어지는 정경만은 훈훈했다. 그때만은 놀랍게도 나의 집중력이 바늘 위에 곤두앉았다. 불타는 잣과 더불어 어머니의 해설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언제나 잣불은 형의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주-2)
모월 모일 모시 출생 아무개, 지금 함께 있지 않아 생사를 알 길 없지만 그저 바라노니 소식 있어 만날 날이 있으리라, 활활 이리 뻗치다 돌연히 꺼질 듯 저쪽에서 쭉 내뱉는 불꽃을 바라보시며 하시는 말씀을 나는 그대로 믿곤 했다. 잣불이 힘차게 뻗치고 또 끈질긴 것을 보아 무엇인가 큰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그런 설명을 믿고 싶었던 것이다.
잣불의 두 번째 것은 나의 것이었다. 아들은 가족 서열에서 어머니보다 우선하는 것이었기에 그러셨을까? 해몽은 언제나 좋았다.
어느 해는 활활 사방으로 뻗치다가 금방 꺼지면 힘차서 좋다고 하셨고, 또 어떤 해는 내가 봐도 힘없이 시들한데도 대신 오래 탄다고 해서 공부를 끈기 있게 조용조용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호두 두 개를 챙겨두고 부지런히 까먹던 것도 그랬지만 이 잣불 풀이는 그래서인지 언제나 즐겁고 또 재미있었다.
정말 나는 잣불처럼 그렇게 힘차고 왕성하게 살 수 있을까?
어른들이 어디서 어떻게 돈을 벌어오는지 그것을 알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의 꿈은 그 잣불 속에 어렴풋이 그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근 40여 년의 단층을 넘어, 인간의 발자욱이 달 위에 그려졌음에서인지 우리 집 대보름은 잣불도 호두도 없이 아파트 숲 속에 묻혀 버렸다. 대신 기계 상자 유리를 통해 달맞이 잔치를 보고 있다.(주-3) 식구의 얼굴과 얼굴들은 외면된 체 인정마저 표백되어 콘크리트 벽에 둘려쌓여 도무지 기계를 통한 간접 대화만 있을 뿐이다. TV는 물론 라디오, 카세트, 비디오 전축이 없고서는 그나마 집안의 움직임이 없는 듯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서만이 아내와, 딸과, 아들 사이의 삶이 있는 것이다. 식구의 입들이 냉장고의 인스턴트와 직결되어 있고, 귀와 눈은 이미 이렇게 TV에 빼앗겼으니 직접 대화가 따스할 리 없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졌다.
그래도 한때는 어머님이 돌아가신 한참 후에도 우리 집엔 잣불이 웃겼고, 오곡밥이 있었다. 쌀, 보리, 조, 콩, 팥이 오곡이라고 설명을 하며, 성씨가 다른 세 집의 오곡밥을 아홉 번에 걸쳐 먹어야 한다는 등 제웅(주-4)에 관한 얘기를 하다가 난데없이「내 더위 사가라」고 엉뚱한 소리로 아이들을 놀린 적도 있다. 처녀들이 담 밖의 사정(事情)을 엿보기 위해 널을 뛰게 되었다는 해설에 갸웃거리는 아이들과 함께 그때만 해도 숨을 바로 쉬며 말하고 웃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것도 벌써 5~6년 전의 일이다. 큰 아이가 고등학교에 들어서면서 진학이라는 지상 목표에 휘말려 우리들 식구들의 머리가 콘크리트같이 변해가더니 둘째가 대학을 가게 된 금년에 와서는 도무지 그 기쁨을 상품이라는 간접 대화로 만족할 수밖에 없어졌다. 대보름이라고 호두 하나 깨물 그런 마음들이 없어진 것이다. 아무리 깨물어도 이가 좋아지기는커녕 이미 우리들 식구의 이들이 모두 문명에 삭아 병들었으니 소용이 없어진 것이다.
어머니의 숨결이 그리워지는 것은 완숙한 대보름의 그 풍요로움 때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대보름과 어머니는 적어도 나에겐 하나의 등식과 같다. 모든 것이 마음과 마음으로 직접 대화가 가능했던 그런 둥근 세계가 있었던 탓이다.
다행히 우리 집 거실엔 좀 어울리진 않지만 어머님에 의해 손수 돌리시던 맷돌이 무겁게 입을 다물고 앉아있다. 대보름 까진 언제나 이 맷돌 속에서 어머니의 정성과 함께 갈아진 빈대떡이 남아있어 따스한 아랫목에 발을 넣고 석쇠에 쬐어먹을 수 있었던 그 기억이 너무나 생생하기에 그것은 적어도 나에겐 돌이 아니며 또한 관상용 골동품도 아니다.
지금은 가보려도 가볼 수 없는 강둑 아래지만 어쩌다 쌍둥이 한강 다리를 건너갈라치면 얼음 배를 타고 풀리지 않던 그때의 의문에 젖어 씩 웃곤 한다.
이상한 것은 그래서인지 지금도 한강의 얼음은 한길이 넘을 것이라며 고집스럽게 생각을 한다는 점이다. 왠지 그 의문은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건만 좀처럼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맷돌을 여동생이 차지한 연유로 지우고 싶지가 않은 모양이다. 대보름 한강의 얼음을 보기가 예전처럼 쉽지가 않지만 얼었다하면 달 속의 옥토끼가 사라진 대신 키만큼의 두께는 그대로라는 믿음은 지워지지가 않는다.

(주-1): 전쟁이 터지기 전인 1940년대 후반의 일이다.
(주-2): 형은 왜정 말기, 1943년 징용되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1970년까지 생사 소식을 한번쯤 알았으나 만나지 못했으며 어머니는 장독대에 치성을 거르지 않으셨다. 형님 몫의 놋주발에서 흐르는 물기를 보시며 언젠가는 만나리라 믿으셨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으로 그쳤고 나는 그래서 결국 법적으로 2대 독자가 되었으며, 나의 아들은 3대 독자가 되어 1992년 6방이라는 것으로 군(軍)의 의무를 마쳤다.
(주-3): 미국 아폴로 11호가 1969. 7. 16. 달 정복과 함께 달 속의 토끼는 사라졌다.
(주-4): 짚으로 만든 사람의 형상이다. 음력 정월 보름 전날 밤 집안 식구 중 제웅직성에 해당하는 액년이 든 사람이 있으면 이것에 그 사람의 옷을 입히고 그의 성명과 출생 년의 干支를 적은 것과 함께 푼돈을 넣어 길가에 버림으로써 액을 막는다고 믿었다. 그것을 주워가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무사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