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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마다 새로운 두 개의 찻잔 덧글 0 | 조회 15,695 | 2009-04-17 00:00:00
정동철  


- 아침마다 새로운 두 개의 찻잔 -
1993

여느 날과 아주 똑같이 우린 그렇게 엇비슷하게 앉고 또 누워서 얘기를 나누었다.
“남편을 독살했다하니 얼마나 불쌍한 사람일까? 믿음이 없는 탓이겠죠?”
소중하게 차 한 모금을 마시는 아내의 모습을 빗겨보며 역시 언제나 그렇듯 훌쩍훌쩍 나는 숭늉 마시듯 찻잔을 땅바닥에 놓고서야 편안하게 소파에 누울 수 있었다.
우리에게 이 시간은 사실 하루 중 가장 안락한 때다. 물론 정확히 말한다면 아내에게 비로소 그럴만한 가치가 주어진 시간이다. 3남매의 도시락을 제각기 학교로 내보내고 그리곤 게으른 나의 아침상까지 치우고 갖게 되는 시간, 두 잔의 차를 사이에 두고 음악과 함께 뚫린대로 터져 나오는 얘기들을 교환하는 바로 그런 시간이기 때문이다.
“언제 예수가 이 땅에 재림할까?”
“예수는 이미 당신의 찻잔에 와 있는 것 아니겠소!”
“그래요, 톨스토이의 그 구두장이 마음 속에 있듯이…. 그러나 그보다 나는 적어도 내가 이 세상을 끝낼 때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그런 세계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이미 나의 찻잔은 비운 지 오래되었고 아내는 이 소중한 시간을 음미하듯 찻잔의 색깔을 아직도 많이 남겨두고 있었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좋은 일, 착한 일을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이 없다면 힘든 것이 사실이 아니겠어요?“
“맞아! 그런 점에선 불교적 가르침이 한 수 위인 것 같긴 하지만―”
“당신은 하필 불교를……”
“아니 불교 자체보단 아는 것이 없어서였는데, 옷을 입은 채 착한 일을 하려면 그게 어렵다는 뜻에서 하는 얘기지.”
“그건 그래요. 거듭나라는 뜻이 아니겠어요.”
“좌우간 밍크 옷을 벗어야지. 그 무슨 피에로라고 하는 실크도 벗어야 할거야. 다이아몬드가 없었다면 죽었을라고? 아무 것도 없으면 얼마나 편하겠어. 홀딱 벗으면 사람 본연의 본성이 나타나겠지. 걱정할 것이 없을 테니 말이요. 그래야 될 터인데―. 당신이나 나나”
“그러게 말이에요. 어디 옷을 벗고 살 수야 없지 않겠수.”
“문제는 모두가 다 착하고 옳게 살아야 된다고 가르치고 또 그렇게 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데 그놈의 옷을 벗으라고 가르치는 사람이 실제는 없는 것 같다는 거지. 누가 옷을 많이 입는지 알고나 있나?…”
“뭐 교회에서만 옷을 화려하게 입는 것은 아니잖아요?”
“물론이지 우선 우리부터가 이렇게 옷을 벗지 못하고 있으니까. 근데 여보! 그 나머지 차는 나중에 마시면 안 될까?”
“.........”
말 대신 특유의 아내 눈짓을 보며 싱긋 말했다.
“아니, 그저 순두부 백반에 옷 벗고 살면 그게 가장 순수하다는 거라고 했을 뿐인데 뭘…”
“당신두 참, 아줌마 올 시간이란 것을 몰라서 그래요...”
아이들이 나가고 아줌마가 오기까지 한 시간 밑도는 이 둘만의 시간을 차와 음악이 차지하는 뜻은 사실 크다. 언제부터인가 두 사람만의 은밀한 시간은 밤보다 아침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그것은 말로서 표현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것이 늘 그 속에 있기에 더욱 크기만 한 것이다.
뻣뻣하니 어기적거리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아내는 웃기만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매우 제한적이다.
“그런가, 벌써 그렇게 됐군. 그럼 참지 뭐..........”

(주): 19세 이하 읽기 不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