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수필
게시판 > 수상수필
「늙은이」 학생 덧글 0 | 조회 434 | 2019-11-12 00:00:00
관리자  

늙은이학생

2019.11.12.

정신과의사 정동철

 

 

해우소(解憂所) 뭔 근심걱정? 뒷간에 앉아 똥 덩이 떨어지니 좌변기, 편안한 화장실이다. 한데 시원한 것이 아니라 기력이 쏘옥 빠진다. 늙은이, 뒷간 하나로 족할 단어에 이런저런 이름들 때문에? 느닷없이 노자(老子)로 이어진다. 늙었다는 것 힘은 들어도 늙은이란 표현 나와 무관했었는데 그게 아니다. 바로 내 것으로 자리를 잡는다. 무릎에 손을 짚어야 일어나 ~~’ 한숨 절로 터지니 어찌 늙은이를 거부하랴. 수술 후 거의 3년째 똑 같은 아침 메뉴 삶은 겨란 두 개와 야채, 입에서 나도 모르게 야채즙 식탁으로 번진다. 늙은이가 확실하다. 노자(老子)? 맞나? 아니지, 늙은나 선생을 말하건데 그게 아니지. 늙은이 학생? 그렇다. 바로 그거다.

 

눈 감기 전에 뭘 배워야하나? 웬 걱정, 책에 둘려 쌓여서 그런가? 그럴 것이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일로 곤욕 치를지 모르겠다.” 어느 교수님의 말이다. 없는 일을 만들어 그럴 사하게 꾸며 곤욕을 치르게 될지 모르겠다는 얘긴데 거기서 뭘 배워야 하나? 교수의 고고한 지조를 배워야 할까, 아니면 그를 그렇게 몰고 가는 모리배 같은 정략을 배워 두어야 하나?

무너진 나라, 기적 같은 변화로 다시 세워 정상화했다라는 대통령의 말씀의 의미를 배워두어야 할까? 엉망진창 이상한 나라라는데 정치가의 수사(修辭)려니 그렇게 익혀두는 게 나을까? 어쩧거나 배워야겠지?

급한 뒤가 사라진 해우소 때문이 아니다. 느긋한 양변기, 갑자기 답지 않게 늙은 선생님의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으로 이어졌다. 걸핏 늘 그런 식이긴 했다. 뭘 좀 생각해 보겠다며 공부를 해야지 하면 떠오르곤 한 것이 노자(老子) 같은 경우였으니까.. 그러나 답이 오락가락, 5천자가 좀 넘는 얇은 책, 알기 쉽지 않은 터에 일종의 정치를 위한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의 이이(李珥)란 사람이 쓴 책이라 하는데 잡힐 듯 안개속이여서다. 처음 제1장과 끝머리 제81장을 되 뇌이다 접곤 했었다.

()를 도라 함은 도가 아니고 정동철을 정동철이라 함은 정동철이 아니며... 믿음직한 말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운 말은 믿음이 없다한다. 정말 아는 사람은 박식하지 않고 박식한 사람은 정말 아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날 두고 하는 말이지 싶다. 교수님이나 대통령님의 말이 매양 비슷해 그 깊이와 참됨을 알기 어려우니 어떻게 배워야 할지 듣지 아니함만 못하게 된 셈이다. 아예 늙은이 학생이 되지 않았으면 좋았으련만 뇌를 거치다보니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이 짙은 안개속이다. ‘생명의 수학이란 책을 봐도 도무지 내 실력으로선 알 길이 없디. 막막할 따름 그래서 하는 말이다.

 

창밖의 입동을 지난 만추(晩秋)가 짙은 색으로 들이쳐 유혹한다. 차라리 풍덩 늦가을 속으로 숨 들이마시며 걸어보면 어떨까, 마침 아내가 스포츠센터로 간다며 나갈 시간 뒤를 따랐다. 탄천 양쪽 뚝엔 가을색이 아주 여물다. 수술을 받은 후 가장 멀리 걷곤 하던 곳까지 돌아오기로 작정했다. 조금은 선선한 맛이 오히려 신선하다. 타는 듯 붉고 노란 단풍잎들 뚝 길가엔 내려앉았지만 날리는 단풍잎은 없다. 쭉 뻗은 갓길 숨은 차지만 보폭 넓어져 신기롭다. 제법이다. 다리 밑을 지나고 또 다른 다리 아래 냇물의 회절(回折)을 지나 플 코스 작심한대로 이어간다. 숨도 잦아들었다. 방울새들이 강 이쪽 나무에서 물 건너편 나무로 우르르 잽싸게 날아 오가고 흐르는 물은 맑디 맑다. 마지막 돌아오는 다리 아래엔 예의 잉어란 놈들 유유하니 마음 예와 한결같다.

 

안다, 안다 말끝마다 안다 늙은이 학생중얼거리다 결국 꽉 찬 가을의 샛길 속, 그네 의자에 이르러 딴엔 문제를 풀 겸 앉는다. 어떻게 배우지? 아침에 눈을 뜨면 침대 옆의 책들, 컴퓨터 키면 양쪽에 수북한 책, 방하나의 책 없앴지만 좌우로 움직이는 맞춤책장의 책들은 마주한 책장 전체의 책들로 여기 저기 서로 빈자리를 다툰다. 딴엔 무척이나 박식하다는 듯, 한 달 전 납골당 예약된 책꽂이 유골과 유품꽂이를 아들과 함께 보며 흐르던 침묵, 알면 얼마나 알며 알면 뭘 알랴 그러나 놓을 수 없는 책들은 밤이나 낮이나 나를 감싸니 모르기로 차라리 만추(晩秋)의 샛길 자연에 비벼 흠뻑 젖어 보기나 할까 다시 걷고 걸으니 무위자연(無爲自然) 가히 비할 게 없다. 야호! 참는다. 늙어서가 아니다. 워낙 목소리 커 어울리지 않는 목청에 놀랄 킬까봐.

곧 앙상해질 가지들 그러나 결코 고개 숙이지 않을 꽉 찬 가을 잎들, 눈 덮인 겨울지나 다시 파랗게 물들 그날, 불쑥 납골당으로 가든 아니든, 뭣하나 사람이 만들 수 있는 풍경? 무위자연(無爲自然)인데, 자연의 변화일 뿐 교수님이든 대통령님이든 사람들에게서 배운들 어찌 자연만 하랴, 꽉 찬 가을 가슴속깊이 들이키니 마냥 그 자리 그대로 거기에 있으면 학생인들 어떠랴 오롯이 족하리라. 어쩌나, 가는 세월은..

 

또래의 할아버지 할머니 내외 오순도순 뭔가 즐거운 얘기들, 모처럼 그들을 앞지른다. 감히 나에게도 이런 날이 오다니. 수술 후 한 번도 앞지르기는커녕 노상 당하기만 했던 뚝 길, 출발하자 다리를 건너 들어선 길에서의 일이다. 홀로 만면의 미소 마냥 흐뭇하다. 길고 길게 샛길로까지 이어 진 빼빼로 다움 날의 미소. 반환(返還)점과 무관한의문의 날, 비로소 늙은이 학생머리가 꿈틀거렸다. 장자(莊子)와 관련된 말, 날아가는 화살은 공중에 서 있는 것이며 굴러가는 달구지바퀴는 땅에 닷지 않는 법이라, 모를 듯 알아차린 맛, 이어진 같은 날의 맛? 잊을 수 없는 맛이다!

건널목 신호등아래, 담담히 느긋하게 선다. (2019.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