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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 인의 뜻 덧글 0 | 조회 17,113 | 2009-04-17 00:00:00
정동철  


- 백만 인의 뜻 -
1993

백만 인파가 머물다 간 곳치고는 흔적이 너무 없었다.
어쩌면 휴지 한 장 없더란 말인가. 그것이 아스팔트였기에 백만의 기도(祈禱)와 넘쳐흐르던 인정(人情)이 대조를 이루어 더욱 싸늘한 느낌마저 없지 않았다.
“우리가 가지고 온 것은 우리가 가지고 가야지요.”
취재기자의 물음에 어떤 신도의 대답이었다. 그의 손엔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쓰레기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기자(記者)는 자랑했다.
“우리도 질서를 지킬 수 있는 가능성을 여기서 엿볼 수 있었습니다.”
한국 천주교 2천 주년 기념 겸 시성식(諡聖式)이었던 1984년 5월 6일 여의도 광장에서 연출된 장면이었다.(주-1)
기자의 평가는 솔직히 경박했다. 무식했다. 아니 핵심 파악을 전연 못하고 있었다. 질서 지키기라는 표어만을 외우다 뱉어버린 습관적 자기도취에 의한 것임을 금방 알 수 있어서 서운했다.
이보다 며칠 앞서 서울대공원이 개장됐다. 그 때 뒤덮였던 쓰레기 더미에 자신의 치부를 아프게 느꼈던 울분이 기자의 입을 통해 대부분의 신문과 함께 그렇게 독백하듯 터트려 내뱉은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생각해 볼일이다.
거기엔 참으로 <질서 지키기> 이상의 매우 중요한 의미가 숨쉬고 있었다.
기복(祈福) 사상이 기독교의 성숙을 막는다는 것은 식자층의 공통적 지적이다. 반드시 기독교만의 일은 아니다. 모든 종교가 똑같다. 헌금을 하면 물질적 축복이 있으리라 믿고 제물을 푸짐하게 바치면 부귀영화가 뒤따를 것이라 믿는다. 돈이 있어야 믿음도 가질 수 있다고 푸념하는 이유다.
너희가… 여호와의 명을 들으면 복(福)이 될 것이요, 너희가… 다른 신들을 좇으면 저주를 받으리라(신명기 11:29~30)
성경이 말하였으니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복을 빌기 위해 제물을 바칠 뿐 복을 받을 만한 윤리적 행동을 무시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주술적 무당 굿거리와 다를 것이 과연 무엇인가.
모든 믿음은 그것이 고등 종교라고 주장될 때 반드시 윤리적 행동 규범이 있기 마련이다. 윤리적 행동 규범에 따를진대 거기엔 상당한 고통(핍박)이 있다. 그것을 감수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축복이 있으리라 보는 것이다.
종교인이 아닌 나에겐 이것이 물론 새로운 것은 아니다. 종교인은 대부분 그것을 암송하고 있다. 그만큼 철저하다. 그러나 윤리적 행동 규범이 고통으로 바뀐다 해도 감수할 수 있는 신자가 얼마나 되는지 그것은 확실치가 않다.
그런데 교황과 더불어 바로 그런 참 모습이 나타났다. 부활의 의미가 강론(講論)되던 그 날의 참 뜻은 어쩌면 천주교 윤리 행동 규범이 몸으로 부활되어 백만의 신도 속에 증거 한 것이 아닌가 한다. 한 개인으로서 쓰레기를 담아 가는 것은 보잘것없는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백만의 마음이 한결같이 같은 행동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은 종교가 갖는 윤리 규범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감히 말하고 싶다.
한국인의 질서 의식이 그 속에서 엿보였다는 것보다는 더욱 소중한 결의가 여의도를 빠져나가는 백만 인의 걸음과 마음 위에 함께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잘했거나 못했거나 스스로 만든 결과를 말끔히 갖고 떠나가는 마음은 표어가 아닌 믿음과 소망과 사랑, 그리고 사명감 속에서 어떤 불의(不義)와도 대처하겠다는 그런 의연(毅然)한 각오가 깃들어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주-2)
질서 의식이 우선한 세속적 결과가 아니란 증거다. 기자가 놓진 참 뜻이다.
사회 정치적 병리가 탁류에 휩쓸려가고 있다.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할 정도다. 거기에 오늘 우리의 핵심적 현실을 보는 눈이 통할 수 있었으면 모두의 가슴이 후련할 것이다.

(주-1): 당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으로 103위의 성인들이 시성의 영광을 입게 되었다.
(주-2): 아마도 그래서 줄곧 명동성당은 인권을 포함한 양심선언에 해당하는 각종 집회장이 되어왔던 것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