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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마음의 닻 덧글 0 | 조회 17,123 | 2009-04-17 00:00:00
정동철  


잃어버린 마음의 닻

바라는 것과 믿는 것은 삶에 있어서 아는 것(지식)과 더불어 중요한 것이라 한다. 캔트가 이론(理論)이성(理性)의 한계점을 느끼면서 지적한 얘기다.
철학을 조금이나마 맛본 사람이면 누구나 공감할 그런 의미가 거기에 있다.
나는 정신과 의사다. 철인(哲人)은 아니다. 한데 이 중요한 요소들을 잃어버린 사람을 보게 된다. 그것도 어쩌다 한 두 사람이 아니다. 면담 실에서 종종 만나는 사람은 물론 신문(新聞)에 오르내리는 지존(至尊?)의 높고 높은 각계 명사나 권력을 손에 쥔 정치가, 아니면 부유층에서 또한 무수히 본다.
무슨 연유일까? 왜 나에겐 이런 사람들이 면담실 밖에서까지 보여 지고 있을까? 그것은 과연 나뿐인가?
“…없어요. 알아서 뭘 합니까? 안다고 뭐가 해결되나요? 아니 될 것도 없고, 되리라고 바라는 것도 없는데, 웃기지요. 그저 그렇게 사는 것 아니에요? 돈이 있으면 술이나 마시면 되죠. 저는 술에 취해 건들거리지는 않아요. 그런 사람은 별로 지요. 뭐가 그렇게 들 불만인지..... 아가씨하고 그냥 즐기면 그뿐입니다. 목표를 정한 것은 아니지만 머리 속에 그 동안 백 수십 명의 아가씨가 지나간 것만은 헤아려 지더군요. 어쩌다 일기장에 몇 번째 여자라는 것을 적게 되었으니까요. 돈이 없을 때요? 없으면 집에 가서 담배나 피어물고 자죠. 어머니가 뭐라고 하냐고요? 어머니가 상담비(相談費)를 내니까 오긴 했지만 상관없는 일이에요. 아참, 담배 한데 피겠습니다.나의 면담 실은 금연으로 되어 있음을 알고 있는데도미안합니다. 전 아무도 안 믿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믿는 것도 안 믿을 것도 없겠군요. 하여간 가보라니까 왔고, 또 얘기를 하시라니까 하는 것뿐입니다. 내일(來日)이요? 미래가 어떤 겁니까. 어머니와 아버지는 장래를 생각하라고 하지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거죠? 하루하루 이렇게 살면 되는 거 아니에요. 혹시 돈이 있으면 만화가게나 차려 놓고 그날그날 들어오는 돈으로 술이나 한잔씩하다, 아가씨와 어울리다 그렇게 자면 되지요. 저는 돈을 주고 여자를 사지는 않습니다. 그런 것은 재미없어요. 그게 싫다면 그냥 오면 되죠. 혹시 호주머니가 비었으면 아무 데서나 그대로 자면 되는 거 고요. 다시 말하지만 바랄 것도, 믿을 것도 없는데 알아서 뭘 합니까….“
대학까지 다녔다는 이 청년의 얘기는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한심한 친구라 말할 것이다. 하긴 인격장애(人格障碍)라는 진단명을 이미 받고 있었다. 스스로 어떤 정신과 의사가 말했다면서 스스럼없이 얘기했다. 하지만 그게 어떻다는 말이냐고 웃어 버린다. 공중에 내뿜는 담배 연기처럼 그렇게 공허하게 지워 없어지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는 듯 조소(嘲笑)인지 자조(自嘲)인지 좌우간 껄껄거린다.
유피(Yuppie=Young Urban Professional)족에 관해 아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서구 사회에 나타난 80년대 고소득층 인간형 5가지 중의 하나다. 도시의 젊은 전문직 종사자라는 뜻인데, 젊고 지성적이고 놀라운 언변과 돈벌이에 대해 열정을 갖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들은 높은 소득에다 전문 직종을 갖고 있어 백만장자를 꿈꾸며 안락하게 산다. 이들에게 유피병이란 것이 있다고 뉴스위크지(1987. 10. 20.)는 보도했다. 미국인 20~50%가 정도 차이는 있으나 성욕(性慾)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식욕과 성욕은 본성(食色性也)이라고 한 맹자(孟子)의 말도 무색하게 동물의 동력(動力)을 지탱하는 두 가지 본능적 욕구가 참이 아니라는 듯 그렇게 무시하고 있다.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80년대의 특징적 병중의 하나다.
나도 이런 사람을 자주 만나고 또 얘기하고 있다.
그러나 청년은 어디에 속하는 사람인가. 그의 부모가 재산가(財産家)라는 점에서 고소득자와 진배가 없다. 실제 그의 몫으로 목장(牧場)이 있다. 마음대로 쓸 수 없는 것뿐이다. 대학까지 나왔으니 형식상 전문가에 속한다. 스스로 백만장자의 꿈이 없으니 유피족은 아니다. 아내를 팽개치고전연 유기 상태는 아니지만요컨대 바람 부는 데로, 물길 흐르는 데로 그대로 먹고 자고 또 시키는 데로 하다가 그나마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흔적도 없이 훌쩍 떠나 감감무소식으로 있다가 지평선의 파도를 올라탄 조각배 모양 불쑥 나타나는 것이다.
유피족은 바라는 것은 있지만 알 것을 알아버려 믿을 것이 없어졌기로 성욕을 잃었고, 청년은 바라는 것이 없으니 믿을 것도 알 것도 없는 말초적 쾌락을 따라가고 있음이 다를 뿐이다. 아마 생리적 기능이 작동하고 있는 것을 믿고 있으므로 그 점에선 같을 수도 있다. 유피족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믿고 있다는 의미가 가미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가 삶의 중요한 요소를 잃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값진 것」을 잃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철학 하는 사람들은「값진 것」을 몇 가지로 분류할 것이다.
생물학적 가치, 경제적, 감각적, 사회적, 지성적, 심미적, 도덕적, 그리고 종교적 가치 같은 것이 그런 것들이다. 이 중에 무엇에 우선순위를 두느냐는 것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얘기다. 앞의 네 가지는 살아가기 위한 가치이지만 뒤의 네 가지는 인간의 생활을 보다 사람답게 하는 가치라고 강조한다.
유피든, 딩크(Double Income No Kids)든 또 청년의 경우이든 앞의 네 가지 가치를 제외하고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 지금 80년대 후반에 그 의미를 가늠하기란 매우 어렵다. 다만 생물학적, 경제적, 감각적, 내지는 사회학적 가치 속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한 것이 공통점인 것은 확실하다. 그저 살아가기 위한 가치에서 따로 생각해 볼 것이 없다는 얘기다.
문제는 어디 이런 사람이 예의 청년만으로 그치겠느냐는 것이다. 무슨, 무슨 족들은 우리나라 사람과 무관하다 해도 결국 흘러드는 조류(潮流)는 어쩔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의 신문을 보면 설혹 주장하는 계층들의 가치관은 그럴싸하지만 결코 살기위한 범주(範疇)를 넘지 못하고 있다. 정치가도, 학생도, 지식인도, 노동자도, 그리고 나도 모두가 같다. 전부는 아니지만 종교인도 엇비슷하다. 부딪치고 넘쳐흐르는 대중 속에서 사람 사이의 신뢰성을 잃고 그저 그렇고 그런 소외감만을 거두어 버린 것이다. 아니 그것만이 살 수 있는 유일의 길이라 판단했을지 모른다.
시장성(市場性)가치 세계 속에 살기에 급급한 탓인가? 마음과 마음으로 통하는 인간관계가 없어졌다는 것이 핵심이겠다.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적당한 위장술(僞裝術)로 족하기 때문이다. 마음의 닻을 통한 사람중심의 중요성이 삭제되어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정확한 답을 누가 내려야 하느냐는 것은 여기서 말할 처지가 아니지 싶다. 나도 모르니까......... 다만 생각만은 해볼 의미가 있겠다는 것이다.

주: 새 천년을 맞이한 2001년의 현실은 220만 독신자에 의한 ‘솔로(Solo, 독신자)’ 시장이 6조에 이른다고 한다.(한국경제신문, 2001. 12. 1.) 나는 ‘한국정신과 診斷분류학회’에서 ‘정신성적 정체성과 성전환’의 특강을 했었다.(2001. 11. 23.) 남자아니면 여자에 속하는 우리의 정체가 무엇인가, 닻이 어디에 있는지 알면서도 그 동일성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인간의 반역은 자연이 허락할지 의문이지만 가수 하리수는 뻐기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