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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과 사위들에게 덧글 0 | 조회 16,740 | 2009-04-17 00:00:00
정동철  


결혼한 딸과 사위들에게

결혼은 왜 해야 하는가.
발단의 출발은 바로 이 어리석은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모처럼 어머니 아버지, 두 분이 오붓한 시간을 가지시겠어요... 저희는 잘 도착했어요. 문석(文錫)씨가 먹을 것을 다 챙겨주어 저는 할 일이 없어요.........”
“그래? 전화 좀 바꿔 줄래?… 아니, 여보게! 진(珍)에게도 기회를 줘야지, 안 그런가? 부산엔 지금 비가 온다니 내일 차 조심하도록 하고...........!”
“염려하지 마세요, 아버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신혼여행을 떠난 둘째 딸과 사위로부터 걸려온 전화 내용이다.
첫째 딸이 결혼할 때도 마찬가지였었다.
그들은 왜 결혼을 했을까? 나의 아내, 그리고 사부인(査夫人)께서는 어떤 이유로 그들의 결혼을 허락했을까?
공통된 의견은, 둘이 자연스럽게 알게 돼 적당한 기간 만나면서 다투기도 하고 또 화해하고 그러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는 가운데 사랑을 확인하고 서로를 소상하게 알게 된 사실을 인정하게 된 연유일 것이다.
처음부터 어른들이 개입한 결혼이 아니었다. 강조하지만 대학을 졸업한 성인의 입장에서, 그들 자신의 사람됨에 따라 서로가 서로를 반려자로 택했음을 이해한 것뿐이다. 이것은 맏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아직 의문이 남아 있다.
사랑을 하면 모두 결혼해도 되느냐는 사실이다.
솔직히 부모의 입장에서 ‘사랑’이란 단어는 매우 모호하고 미묘하다. 그것은 매우 가변적 표현이기에 믿을 만한 단어가 되지 못한다고 여긴다. 사랑의 본질이 엉터리라는 뜻에서가 아니다. 두 인격체가 갖는 그 시점에서의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확고한 지속성을 갖느냐는 의문 때문이다. 인간이 쓰고있는 사랑이 영원하다는 점에 동의하는 어른은 별로 없다. 결혼의 조건은 그래서 생겨난다. 사랑을 객관적으로 보증 받을 수 있는 조건을 따져보기 위한 것이다. 아니 사랑이 아니더라도 인내하며 끈기로 살 수 있을 만한 조건이 얼마나 어우러져 있는가를 검토하는 작업이다.
제크린이 그의 남편 케네디를 잃고 오나시스와 재혼할 때 결혼 조건(계약)은 자그마치 171개항에 달했다고 타임지는 소개한 바 있다.
나의 딸과 사위, 그리고 양가 부모는 어떤 조건을 생각했을까.
그들의 사랑을 인정했지만 결합의 조화를 조건에 맞추어 무엇보다 먼저 보려는 것은 어른들의 시각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학벌이나 가문, 건강은 물론 사회적 위치로 가늠된다.
뛰어난 외모는 그다지 중요한 조건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고개 들어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추남․추녀가 아닌 바에야 외모는 결정적 요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나의 경우 사위 될 사람이 지닌 조건만을 따져 허락이 가능했다면 마담 뚜가 나서는 조건부 중매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중요하게 염두 한 것은 두 사람이 갖는 성격상의 조화가 앞으로 어떤 작품을 연출할 수 있겠느냐는 점이었다.
성장 배경이 서로 다른 과거에 지나치게 얽매이거나 무시하지도 않으면서, 서로 이루어나갈 미래를 함께 생각하고, 함께 행동에 옮겨가는 자세가 진지하게 엿보였을 때, 우리 어른들은 더 이상 관여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여긴 것이다. 사돈도 역시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당사자들이 막상 우리가 생각한 대로의 자세를 갖고 살 것인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관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물론 서로에게 보완해야 할 문제점도 있을 것이다. 그 점을 도와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 아닐까한다.
하나 무엇보다도, 그들 당사자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점을 서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인생살이는 어차피 문제 해결의 연속이다. 성장 여건과 배경이 다른 속에서 자란 사람들의 생활 방식이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같을 수는 없다. 이런 전제하에서 상대방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자기 중심적인 사고(思考)만으로 상대방을 탓하고 자신의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이려 강요한다면 진정한 결혼의 자격은 갖지 못한 사람들일 것이다.
우리 내외는 자식의 연애 결혼에 큰 단서나 조건을 내세우지 않고 대체로 무난하게 혼사를 치렀다. 만약 중매결혼이었다면 어떤 자세로 임하였을까.
중매결혼을 할 때는 대개 결혼해서는 안될 조건이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사람을 소개받고 소개를 부탁한다. 그것은 물론 당사자와 부모들의 가치관에 따라 다르겠지만 가문․종교․고향․경제․학벌․건강… 등 많은 조건들이 저울질되고 검토될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혼사에 있어 재물을 따진다는 것은 오랑캐의 짓이라고 아무리 강조하며 떠들어보았자 극복하기 어려운 벽이다. 기성세대의 고정된 편견은 매우 두터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조건들은 정신적으로 충만한 애정의 깊이와 영혼의 결합을 큰 비중으로 여기지 않을 때 거론될 수 있는 사항들이다. 중매는 그러기에 달리 방법이 없다.
따라서 신선한 개혁은 젊은이 스스로에게서 기대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두 사람이 각각 자신과 배우자 될 사람에 대한 이른바 오리엔테이션을 충분히 갖고 난 후, 함께 할 수 있겠다는 각오와 자신감이 섰다면 그 밖의 조건들은 별 의미가 없다고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반드시 연애 결혼에서만 이 같은 원칙이 옳다고 강조되는 것은 아니다. 중매로 선을 보아 알게 되었다 해도 충분한 시간과 만남의 기회를 통해 서로를 살펴서 그 삶의 성격과 내면 세계가 자신과 잘 부합된다고 여겨지면 이른바 나열 식 결혼 조건은 별 의미가 없어지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젊은 결혼 당사자들의 결단에 달려 있다. 다만 그들에게 과연 그런 식별 능력(?)이 있겠느냐 하는 점이다.
막연히 어떤 슬로간에 따라 결혼하라고 캠페인을 벌여 사회적 문제 해결의 제물이 되라고 할 수는 없다. 가령 지역 감정을 초월하라, 학력을 무시하라, 종교 차를 극복하고 연령이나 신체 장애쯤 별 게 아니라고 아무리 떠들어도 그것은 의미가 없다.
사랑이 모든 것을 초월한다는 점에서 젊은이들은 신앙처럼 그 의미를 강조한다. 사랑을 얘기할 때 이런 저런 조건을 거론하는 것은 오직 기성 세대들 뿐이다. 눈에 콩 깎지가 끼었다고 탓해봐야 의미가 없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사랑한다 하되 두 사람이 이루어 가야 할 결혼 생활이 무엇인가를 얼마나 알고 있느냐는 것이 더 소중하다. 따라서 탐색은 냉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조건’보다는 상대방의 성격이 어느 만큼 성숙 한가를 보는 안목과 더불어 당연히 자신에게도 새롭게 검토되어야 할 점인 것이다.
성격은 문제점에 부딪칠 때 그 사람 특유의 개성과 성품을 나타낼 뿐 아니라 문제 해결의 독특한 방식을 의미한다. 말하긴 쉬워도 검증은 어렵다. 몇 가지 질문을 각자에게 자문자답할 수 있도록 제시해 본다.
첫째, 자신의 현실 즉, 분수를 검토할 줄 아는 성품인가.
둘째, 계획하고자 하는 것들이 건설적이고 창조적인 것인가.
셋째, 작심한 언행의 결과에 떳떳하고 자신 있게 책임질 수 있는가.
넷째,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 체계가 어떤 것인가를 익히고 있는가.
다섯째, 자신의 존재에 대해 긍정적 자부심과 자신감을 갖고 있는가.
여섯째, 너와 나, 그리고 현실 사이의 거리에서 문제 해결의 융통성을 갖고 있는가.
얼른 대답하기 쉽고 금방 이해가 가는 질문들이다. 그러나 여기에 담겨진 참 뜻을 알고 있는 완벽한 사람은 없다. 중요한 것은 자신과 배우자가 될 사람이 각각 이들 문항에 대해 얼마큼 허점이 있는 지를 시인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약점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자신의 문제를 안다는 것은 곧 성숙으로 가는 지름길을 의미한다.
분명히 인간이기에 족하지 못함에도 과장하여 만점을 고집한다면 솔직히 그런 사람은 발전의 가능성이 없다. 그저 서로의 미모와 조건에 노예가 되어 황홀한 사랑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소유하고 싶은 욕망에 의한 것에 그칠 것이다.
대개 문제가 없다고 장담하는 두 남녀가 문제를 만났을 때 필연적으로 그 책임은 자신이 아니라 상대방에 있다고 우긴다. 자신은 늘 만점이니까 그래서 실망은 상대적으로 커지기 마련이다.
세 살 버릇이 여든에 이른다는 우리 속담은 퍽 의미가 크다. 어릴 때 형성되어온 성격이 어느 날 갑자기 바뀐다는 것은 득도(得道)를 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에겐 불가능하다. 비관론이 아니다. 자신의 문제점을 알고 솔직히 시인하는 두 사람의 만남은 설사 시간이 걸려도 결혼 생활은 순조로울 것이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해결할 문제가 없는 결혼 생활은 무덤이다.
조건에 노예가 된다면 결혼 생활은 스스로 가두어놓은 감옥일 수 있다. 사랑과 성격의 취약점을 간파한 지혜가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은 감옥이 아니라 자유다. 따라서 결혼해선 안될 조건은 자격증의 유무나 출신 배경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의 문제점을 알고 자신과의 관계에서 자부심을 갖고 척하지 않는 떳떳함에 익숙하면서 배우자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곱 번째를 말한다. 인간적 정(情)을 적어도 우리는 익힌 데로 지켜 가는 것이다.
말은 쉽다. 몸으로 이어지기가 어려우니 씹고 또 음미해야 할 결론이다. 우리의 아들딸들이 어떤 수준에 있는지 부모는 그것을 또한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된다. 안으로 굽는 손에 더욱 힘만 덧칠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궁합이나 사주팔자를 봐야하는 부모의 심정엔 그만큼 그들도 앞날을 알 수 없다는 역설적 얘기가 된다.
부모들은 스스로 아들딸들의 실체를 직시할 수 있는 책임감을 지녀야 할 때라본다.

(주): 2002년 3월 초 어느 날 외손녀 금주현(중 2)이 말했다. 호주로 유학을 떠나난다고 이것저것 정리하다가 엄마(나의 맏딸)가 초등학교 때 받은 무슨 상장 뒷면에 이런 재미있는 글이 있었다고 했다. 나와 아내의 서명이 있는 것으로, 수경이 생활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우수한 학생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바에 부모가 그의 뱃전의 노를 지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뜻에서 였다. 현재 나는 며느리와 친손녀 둘이 있다. 3남매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연애 결혼을 했다. 무리 없이 살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