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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무엇이 숨쉬고 있어야? 덧글 0 | 조회 16,556 | 2009-04-17 00:00:00
정동철  


가정(家庭), 무엇이 숨쉬고 있어야 할까?

갑자기 집이 꽉 찼다.
세간이 들어온 게 아니다. 새로 뭘 사들여 놓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좋았다. 둘째 딸이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던 날 저녁, 식탁이 꽉 찼기 때문이다.
식탁이 풍성해서가 아니었다. 딸을 보내야 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한편 아들 하나를 얻게 됐다고 생각을 갖게 되고선 든든하고 대견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이제 여섯 개의 의자는 둘이 모자라게 됐다. 그러나 오가는 마음속의 즐거움, 그리고 느낌과 생각들이 함께 어우러지게 된 풍성한 식탁 속에 부족한 자리는 의미가 없었다. 꽉 찬 것이 그저 좋을 뿐이다. 시간은 변화의 심술쟁이다. 횡 하니 식탁은 넓어지고 대신 TV가 자리를 대신한다.
나는 TV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시간도 없지만, 그 때문에 막상 아내와 아이들과 얘기할 분위기가 없어져서 싫다. 음악만 진행되는 전축이 그래서 좋다.
한데 집이 정말 언제나 좋기만 한가 반문해 본다.
문제란 것이 없느냐는 것이다. 문제는 늘 있다. 싫을 때도 있다. 물론 풀어야 할 견해차, 해결해야 할 부딪침이 없다면 얼마나 답답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실은 집이 좋은 이유이다. 문제를 문제시하지 않으면서 풀어 가는 우리 집은 그러기에 좋다는 결론이다.
모범적 가정이라던가, 우아하고, 풍요롭고, 큰 소리가 없는 집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짜증이 있고, 침묵과 울화도 있다. 걱정과 근심, 그리고 한숨이 있을 때도 있다. 여니 집과 사실 차이점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럼에도 좋다는 것이 대답이다.
한국 가정, 특히 오늘의 그 실체는 어떤 것일까?
가족 구성원 사이의 관계를 중심으로 할 때 그 해답은 의외로 까다롭다. 한국 갤럽에서 펴낸「한국인의 가정생활과 자녀 교육」이란 책자를 보면 문제점들이 잘 나타나고 있다.(주-1)
한국, 일본, 영국, 프랑스, 서독, 미국 등 6개국을 상태로 비교 조사한 결과에서 가정생활에 만족도가 그중 낮은 것이 한국이다.
가정의 개념도 다르다. 우리는「같은 피로 맺어진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보는데 비해 구미(歐美) 각국은「사랑으로 맺어진 사람들의 모임」으로 보고 있다.
세부적 분석 내용을 소개할 생각은 없다.
왜 피로 맺어진 진한 관계 속에서 만족도가 높지 않을까 하는 의문만은 함께 풀어볼 과제라 본다.
정신과 의사라고 별다른 안목이 있거나 식견이 높은 것은 없다. 남다른 지혜가 있다고 믿지도 않는다. 다만 문제의 청소년 소녀와, 문제의 부부를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고, 그들의 현장(現場)을 누구보다 자주 깊이 있게 대하는 가운데 그 연유가 무엇일까 궁리해 본 차이가 많다는 것이 전부다.
피가 물보다 진한 것은 사실이다.
피는 잘 엉겨 붙는 습성이 있다. 여차하면 불문곡직하고 엉겨버려 감정적 배타성(排他性)이 강하게 나타난다. 친화성(親和性)이 강한 반면「나」는「우리」속에 파묻혀 합리적 자기주장이 대체로 뒤엉킨「우리」라는 의미의 감정으로 맥을 추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서구화(西歐化)되어 가는 현상에서 가족 구성원 사이의 불만으로 탈바꿈되기 일쑤다. 피로써 맺어진 관계는 현대 사회의 생활 방식에선 크게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핵가족의 분포도가 확산되어 갈수록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결과가 되어가고 있다. 그렇다고 서구식 사랑의 관계로 아직 잘 굳혀진 형편은 아니기에 더욱 그 괴리(乖離) 현상은 커질 수밖에 없다. 물론 서구적 사랑의 관계가 최선이라는 전제는 아니다.
게다가 문제가 뒤따라 벌어지고 있다. 남편(또는 아버지)은 권위를 잃어버렸다. 가부장적 전근대의 사고방식이 인민재판처럼 공격을 받는 가운데 주춤거리고 있다. 빼앗긴 것이 아니라 포기한 남자들의 나약한 모습에 실망이 크다고 한다. 항해 중의 키를 잡으면 전제적(專制的) 구습(舊習)의 권위라며 타도(打倒)되어야 한다면서 막상 키를 아내에게 넘겨주면 남자답지 못하다고 또한 구박이 심하다.
이러 지도 저러하지도 못하는 가운데 편리한 기계가 거실이나 안방에 등장했다. TV라는 것이다.
모두가 화면(畵面)을 들여다보고 간접 대화로 족하게 됐다. 중계 역할을 착실히 하는 TV덕분에 가족들은 서로의 일에 관심을 잃고 화면에 매달려 간접 대화만 있으면 그뿐인 것이다. 「오순도순」이란 언어가 전연 필요 없게 된 것이다. 철저하게 저마다의 심리적 공간을 강조하고 그래서 영역 침범에 상당한 불만을 갖게 된 것이 말하자면 오늘의 현명한 문명이기(利器)때문이란 것이다.
우리는 본시 동물의 속성답게 움직이는 것을 바탕에 갖고 있었다. 구하기 위해 움직여, 힘들게 가서 부딪치고 겨루었다. 지금은 앉아서 단추만 누르면 된다. 원격(遠隔) 조정이 가능하여 가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앉아서 선택할 수 있다. 자기 뜻대로 조정하여 자기중심적으로 얻어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
인간관계도 같은 이치가 적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배우자를 이해하고 거기에 접근하기보다는 앉아서 배우자를 자기 마음대로 조정하고 싶어 한다. 자기 뜻대로 배우자가 조정될 때만 편하고 필요한 존재가 된 셈이다. 여의치 않으면 화를 내거나 침묵으로 일관한다.
부부간의 문제가 많은 상담 기관에서 조사되고 있다. 부모와 자녀 사이의 문제도 똑같은 관심사가 된다.
논제(論題)의 핵심은 갈등이라고 지적되고 있다. 그것은 성격 차에 의해 온다고 주장한다. 문제 해결 방식이 서로 다른데 인식의 변화를 가지려고 조금도 애쓰지 않는 것이 화근이라는 뜻이 내포되고 있다.
사랑으로 맺어진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서구인의 가정관(家庭觀)은 의미가 다르다. 그들이 강조하는 만큼 이상적(理想的)상황에 있다고 동의하고 있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렇게 되어있지 못해 기대감이 반영된 탓인지는 모르나 사랑이 몸소 함께 하는 가정은 남을 자기 마음대로 조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상당히 큰 차이가 있을 듯 하다.
우리는 가족 상호간에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자녀들은 말한다.
돈과 명예, 그리고 권력으로 부족함이 없는 생활을 꾸려 주었다 해서 그것이 사랑했다는 증거라 말하지만 사랑을 정말 받았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훈육(訓育)과 조정(調整)은 뜻이 다르다. 앞의 것은 사랑이 있고 뒤에 것은 이기주의의 연장이다. 관심과 조정이 다르다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랑과 간섭이 같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다.
배우자와 자녀에게 나는 어떤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일까?
자문자답한다.
TV를 좋아하지 않는 다고해서 나는 정말 풍족한 대화를 하고 있다고 과연 족하다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주-1): 한국 갤럽 여론 조사, 서울,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