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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체(黑體)? 덧글 0 | 조회 727 | 2020-09-25 00:00:00
관리자  

흑체(黑體)?

2020.09.25.

정신과의사 정동철

 

기회는 평등, 과정은 공정, 결과는 정의 -

가장 아름다운 풍경, 어제의 지금과 오늘의 지금 그리고 내일의 지금은 그러나 왜 주식시세(株式時勢)?

우연히 부엌 창문 옆에 선다. 아침 6시 한참 전, 남한산성과 숯내(조선조 인근에서 숯을 굽던 곳) 사이 낮 선 풍경이 훌쩍 다가선다. 흑체(黑體)? 숯처럼 새까맣다. 탄천(炭川, 숯내)이 거기에 있어서인가? 베란다로 나와 문을 연다. 찬바람 사이로 분명해진다. 이내 사진에 저장한다. 대형흑체(大型黑體)! 당연히 해가 뜨기 전이라 반사될 빛이 없어 검다는 것은 상식, 그러나 네모반듯, 새카맣게 커다란 풍경은 본 적이 없다. 산넘어 하늘은 진보라 밝은색, 검은 것을 희다고 여기는 세상이라 빛이 희미하든 세든 반사될 것이 없기에 그런가? 숯뎅이 되어 빛을 탐욕스레 삼킬 뿐 내보내지 않는 흑체, 왜 거기에? 너무 이상하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파장(波長)? 전자기파(電磁氣波)로 얽혀든다. 자기파를 빨아만 들이다니.

앞 동으로 시선이 옮겨진다. 집 집마다 거실 큰 창문들이 행렬수학(行列數學)처럼 어둠 속에 좌우 상하로 배열되어있다. 역시 네모진 흑체, 빛을 반사하지 않는다. 요즘의 인심처럼 인정을 깡그리 빨아들일 뿐 내뱉지 않듯 그러고 보니 사진 속에 담겨진 남한산성 아래 흑체 풍경, 그 정체(正體)가 어렴풋이 조합을 이루어 간다. 빛의 반사가 없는 대신 몽땅 흡수된 미묘한 결과, 무슨 과학? 어쩜 평등사회(平等社會)에 감히 개천절 집회? ’반사회적 범죄라기에 놀라 움츠러든 사람들, 그래서 침묵? 흑체의 과학은 본래 그런게 아니었는데.. 착시(錯視)?

 

마침 외손녀가 오랜만에 왔다. 그 전날이다. 내과 의사가 되려는 전공의다. 당연히 치료자 자세에 대한 얘길 나눈다. 공학박사인 그녀의 신랑 그러나 손녀의 부모와 함께 그들은 알기 수월치 않은 얘기다. 의사끼리만 통할 수 있고 또 알아야 할 것들, 60년 의사 생활의 경험을 버무려 일러주기로 한다.

 

홍역 치렀지? 집단휴진 말이야. 왜라는 정치 사회적 사연은 빼기로 하자.. 장차 의사로서 간직해야 할 치료자의 통찰력(洞察力,이해력), 생각보다 쉽진 않지만이미 알 것. 요컨대 환자를 만나서 치료가 끝날 때까지 치료자 자신의 역할과 환자 사이의 관계를 깊이 이해하는 가운데 우선 정확한 원인을 찾아야 하고, 최고최선의 치료를 수행할 수 있는 의사가 된다는 것,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겠지. 해 낼 수 있다고 기대하는 할아버지, 의사로서의 보람일 것.”

 

진찰할 때 증상만 우선 해결해야 할 급한 경우, 대증요법을 선택하는 것이 의사. 가령 위장에 탈, 배가 아프다면 대략 9가지 정도의 증상 중 어딘가에 속한 원인과 진단부터 따져간다, 호소하는 증상에 따라 처방을 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확진될 때까지 이기에 원인 치료는 아니다. 증상만 일시완화 시키는 정도, 이번 집단휴진을 두고 하는 댓글들 밥그릇만 챙기는 놈들, 싹 감옥에 처넣고 쿠바에서 의사 수입.. 돈에 눈먼 놈들 아닌감참담하다. 그 겉보기 치료가 전부인양 믿는 그들 식견의 한계, 오히려 도처에서 박사를 방불한다.

더러 대증요법을 중심으로 치료하는 의사가 있긴 하지, 광고로 명인입네 하면서 돈을 노리는 셈, 하지만 그것을 목적으로 치료자가 되진 않았겠지. 당직 힘들지? ‘진단학(診斷學)을 배워 알긴 하겠지만 어쩌겠나. 그러면서 배우는 것. 심각한 치료현장들, 화낼 틈도 없을 것, 의사가 갈 길만 가는 것뿐, 그렇겠지?”

원인 치료는 일견 외과수술을 통한 경우가 쉬운 예다. 맹장이 터졌다. 진단을 위한 다양한 검사, 수술이 시작되면 어떤 마음? 아품으로 뒹굴던 환자의 심정을 통찰하며 그 사람에 집중한다.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해서 공부의 연속이다. 내과 의사? 위암 환자를 만난다. 복잡한 진단과정 그리고 어려운 해독(解讀)에 이어 치료원칙을 정할 때 깊은 통찰력은 필수다. 돈이 아니라 치료될 수 있는 최선의 역할은 무엇인지 그 결정은 고통이다. 진단학 자체를 모르는 사람들의 원망이 비록 대증요법을 전부라 믿고 하는 말이라 해도 흔들림 없는 확신과 신념 오로지 환자만을 생각할 뿐이다. 그래서다.

의예과 2, 영수국(英數國), 역사, 철학, 윤리, 독어, 불어, 라틴어 그뿐인가 생리, 화학, 물리, 실습을 포함 아침 9시에서 오후 5시까지 딱 고3때다. 지겹다. 치료현장에 수학이 왜 필요한가? 바로 통찰력으로 통한다. 나중에 깨닫는다. 본과로 올라가 기초 2, 해부, 병리, 약학, 미생물, 생화학, 조직학, 예방의학.. 이어 임상(臨床) 마지막 2년은 각 과를 돌며 실습과 수술실까지 병동에서 첨단검사현장으로 실습의 모든 결실(結實)들이 바로 치료자로 서의 역할을 할 때 작동되는 통찰력에 연결된다. 그뿐인가 지금 하고 있는 전공의과정 4~5년이 더 필요하다. 쉽겠나? 어렵기로 평등이념을 바탕에 둔 능력주의 제도는 없을가 한숨, 시시비비가 끊임없고 이념적 갈등은 치료 순간에 어떤 영향력을 줄건가? 공공의대가 문제되는 이유다. 오로지 노력의 대가에 따른 능력에 의한 진료뿐인데.. 민주화 운동의 아빠나 엄마 찬스로 순수한 의사가 될까?

 

의사는 한마디로 원인치료자가 되려 한다. 그러자니 적절한 검사를 통한 진단과 더불어 그 아픈 부위와 싸우는 그 환자 바로 그 사람과 깊은 소통과 이해 없이는 될 수가 없음을 안다. 더 이상의 얘긴 생명, 그건 어렵다.

 

의사 중에 하는 것도 아는 것도 없는 과는? 정신과라 한다. 눈에 띄게 하는 것 없으니 사실 그렇다. 내 경우 30년 이상 치료한 환자들이 적지 않다. 단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 병으로 그렇게 오랜 세월 치료를 한다는 사실. 평생의 작업? 거기엔 치료자 자신의 통찰력(insight 이해/자각)이 있어 스스로 분수를 포함한 분석력이 숨어있다. 치료로 연결되는 핵심 방편이다.

 

모처럼 왔는데 장황한 얘기 여기까지, 요즘 사는 것, 산다는 것이 사는 게 아니란 얘기들 많이 하더라고. 코로나 19도 그렇고 그와 뒤엉켜 평등과 공정과 정의로 시끌시끌 흑체처럼 형편이 말 그대로 깜깜이지. 사람마다 갖는 특색이 지워지고 모두 캄캄해졌다는 것, 솔직히 답답하다. 재미가 없다. 그래서 하는 얘기, 치료자가 통찰력을 갖고 있는가 아닌가가 핵심 문제이련만 인과율(因果律)과 동떨어진 논리만 우격다짐식 세상. 정치인은 정신감정 예외 군에 속하는지 자신에 대한 자각과 통찰력은 오간데 없고. 일부이긴 하나 하여간 분수는 나 몰라라 그저 내로남불‘. 미성숙 인격장애 같은 아주 악랄한 경우가 허다한 게 현실. 이른바 남북 공동작품? ’공무원의 화장(김어준, 25TBS 뉴스공장-22일 북에 의해 射殺 불태워진 끔직함, 군과 대통령 누굴 위한 존재?)사건, 얼마나 잔인한가. 치료자의 역할이 작동할 여지가 있겠나? 걸핏 고성 삿대질들. 의사라고 똘똘하니 다를까? 배우고 또 배워도 모자라 평생 배우는 연유지만 답답. 명치가 뭉친다.

달리 말하면, 오늘의 지금이나 내일의 지금이 진지하게 평등과 공정과 정의로 주심의 판정이 양쪽에 똑 같이 적용되는 것을 관중(국민)이 보게 된다면 치료는 순조롭게 이루어지련만 권력을 오래 잡겠다는 것뿐, 마치 부덕한 의사가 돈에 눈이 먼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관중도 마찬가지다. 어느 한 편만 편들다 보면 주심도 기울어질 것, 그게 우리가 원하는 건가? 관중의 수준이 주심의 수준을 결정하듯 국민의 수준이 지도자의 능력과 수준을 좌우하는 것은 상식일 것이다. 자문자답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대목이다.

새카만 흑제, 용광로의 석탄이나 숯이 타면서 파란 불꽃을 거쳐 하얀 색으로 변해 드디어 쇠를 만든다는 사실, 인간의 삶에 전환점이 되었다. 모두가 아는 이치, 여기서 바로 양자역학이 나왔지만 복잡하고 어려운 얘기, 과학적 분석력에 따른 지도자의 진솔한 마음의 자세가 치료자적 의미를 바탕에 두느냐 여하에 따라 역사가 바뀌고 노벨상도 거기서 나온다는 점만 이해하면 될 일이리라.

 

결국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얘기다. 지지고 볶고 편갈라 싸우지 않았음 좋겠다. 외손녀는 전문의가 되기 위해서라도 알아들었을 것이라 믿고, 흑체는 쓸모없는 검은 돌이 아님을 일깨운다. 떠나려는 손녀에게 말한다. 신랑 얘기, 멕스웰 덕에 산다는 건 무슨 뜻이지? 전자기파를 말한다고? 저기 양자TV처럼 의학에도 양자물리학적 접근은 불가피할 것, 흑체복사에서 시작됐으니 참고할 일, 더구나 남편의 전공이니? 1850년 멕스웰 머릿속에 있던 전자기파, 200년 전까지는 몰랐던 흑체복사, 아니 100년 전까지도 정확하게 그 정체를 알지 못했지. 쇠를 만드는 용광로의 불꽃이 바로 양자TV로 이어진 셈인데 양자물리학으로 숫한 노벨상과 함께 우리의 현재와 미래의 삶이 확 바뀌었고 바뀌지 않겠나? 불행히도 우린 지금 어디로 가는 세상인지 몰라 거론할 처지가 아니나 다행스럽게도 과학자들은 꽤 있다. 신랑이 속한 연구소장만해도 그렇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든다는 현 정권, 빚에 허덕일 청년들, 나라가 거꾸로 가고 있다(https://news.joins.com/article/23878594?cloc=joongang-home-opinioncolumn) 하니 기가 차네. 통계가 말하지. 출산율은 세계역사상 최하위 0.84~0.94로 떨어지고 지출은 오히려 늘었다. 자살 역시 부동의 세계1위다. 비정규직 문제, 균형발전 또한 먼저 정권보다 나쁘다. 산업재해는 늘기만 했다. 코로나 19 이전까지 현 정부의 업적이다. 코로나 19를 합치면 더 커지니 답답. 어디까지 더 가야 할 건가? 정확한 진단과 원인 치료(대책)가 답 아니겠나. ’평등은 이루어졌고(완료형) 그러기에 공정은 정확하게 뒤따르고 있다며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국민이 아니라 하면 지도자의 치밀한 자각을 포함한 통찰(洞察)로 불쌍한 흑체 같은 마음들은 어떻게 될까? 들어봤나? ’태스형, 세상이 왜 이래..‘(나훈아 노래), 손녀 부부는 공감한 듯 웃으며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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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잘나서 하는 말이 아니다. 다 같이 그렇게 가자는 것이다. 코로나 19 방역은 당연히 중요하다. 헷갈리는 불안으로 피해갈 길만 찾으려 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막다른 골목일 것이다. 말이 아니라 행동만이 절실할 뿐 진솔한 분석을 통한 대응책과 더불어 제어하는 길 그것만이 절실해졌음을 의미한다.

어떤 사회든 잘하든 못하든 반대파는 항상 있다. 객관적으로 반대 상황에 대한 진의와, 주심 스스로 자신에 대한 자각 내지는 통찰력과의 함수(函數) 관계만 풀어 간다면 다행, 원만해지리라는 것은 상식이 아닐까? 착각인가? (2020.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