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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한계(限界) 덧글 0 | 조회 16,067 | 2009-04-17 00:00:00
정동철  


- 슬픈 한계(限界) -
(2008.9.20.)


슬픈 한계, 단언하건데 그것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한계가 있어 슬픈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모르거나, 안다 해도 그것을 외면하기에 슬픈 까닭이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가령 부모에게, 자식에게, 배우자에게, 이웃에게 그 맵고 쓰디쓴 슬픈 한계를 느끼며, 결국 자신의 참담한 한계까지 절감해야 한다. 차라리 끝장을 보고 싶다는 극한적 상황과 마음의 난투극이 벌어지기 십상이다. 우리의 자살률은 세계적이다. 언필칭 아노미현상(살아가기 위한 행동양식의 모범이 되는 윤리-도덕적 규범이 와해된 사회적 현상, 이것은 우리 사회가 특히 이분법적 대립구도를 조성하는 가운데 「모」 아니면 「도」가 연출한 결과다.)이 원인이라 하지만 이렇든 저렇든 인생사는 대저 그렇다는 것이다.
한계 자체는 그러나 약점과 다르다. 그가 속해있는 사회적 계층을 기준으로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뿐 인간의 본성과는 더욱 별개의 문제다. 부족한 인간적 면면 자체는 오로지 한계일 뿐이다. 선악기준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는 뜻이다.
자신에게 한계가 있다는 것은 따라서 약점이 아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 약점이자 위선이며 결국은 비인간적 양면성을 노출할 뿐이다. 슬픈 한계는 아마도 그래서 결국 인간의 숙명이라 할 것이다. 자신의 한계를 우리 모두는 정확히 모르기 때문이다. 결코 알든 모르든 한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이다. 이것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의 공통분모다. 심지어는 가공적 인간 뇌(腦)의 산물인 신(神) 또한 예외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사람」의 한계를 이른바 대화의 성찬에 메뉴로 올려놓는다. 한계와 사람의 됨됨이를 동격으로 취급하며 씹고 짓이긴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든 악풀들이 난도질을 하며 깔깔거리는 가운데 피멍이 질퍽한 수렁 속으로 처박는 것이 인터넷시대의 현상이라 하지만 아쉽다. 안타깝다. 앙천대노(仰天大怒), 그저 서글플 따름이다. 드디어 울분에 꽉 찬 증오를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고부간의 애증이 그렇고, 부자간(父子間)의 격투가 그러하며 인터넷에 숨은 총잡이들은 말할 것도 없이 그 대표적 예일 것이다. 증오는 극에 달해 살인적 분노가 놀랍게도 뒤범벅이 되어 부메랑처럼 자신으로 돌아와 자살이라는 끔찍한 현상으로 이어지기 예사다.
그런 점에서 정치가들은 특별나다. 대개의 정치주자들은 그 한계를 교묘하게 약점으로 가공하여 이용한다는 점에서 영리하긴 하나 매우 악의적이며 그런 면에서 대개의 정치가들은 그야말로 한계를 최대한 도용하는 이전투구의 주인공들이다.
때론 상대방의 한계에 불꽃같은 환호를 쏘아 올리는 경우도 있다. 올림픽이 그것이다. 너의 불행은 나의 행복, 인간적이라고 해야 할지 그것은 모르겠다.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거기에 도전하는 경우도 그렇다. 생명을 담보로 한계를 극복하겠다는 것 역시 인간적인지 정말 모르겠다. 모두 돈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돈에 포환이 된 증오와 절망감, 아니면 돈벼락이 쏟아지는 환희라는 갈림길이 다를 뿐이다.

미국의 한 대학에 적을 둔 교수 한분이 독도(獨島)문제에 대한 패널리스트로 건국 60주년 기념을 전후해서 잠시건너 왔다. 발표한 내용을 사석에서 들었다. 메니페스토, 파워게임이론, 영토분쟁에 관한 정치사 등 그의 정치학 전공은 세계적이다. 들어보니 독도가 한국의 영토로 되어있다는 고지도(古地圖)나 문헌으로 따지는 것은 순진한 논리라고 했다. 아무리 고증된 자료가 즐비하다 해도 그것은 힘의 논리에 속수무책,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얘기다. 듣는 순간 다소 울분이 목젖을 흔들었지만 참았다.
생각해보니 그렇게 치면 유럽의 그 혼란스럽던 지난날의 전쟁사-종교사(宗敎史)이기도하지만, 속에서 수시로 바뀌었던 나라사이의 경계선을 두고 과거의 사료(史料)가 이러했으니 내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야말로 정신 나간 짓일 것이다.
UN헌장이 엄존함에도 미국은 이라크를 치고, 모스크바는 그르지아를 공격한다. 힘, 오로지 돈의 힘이 지구상에 최대의 율법이다. 접근은 그런 차원에서 가능할 뿐이라 한다. 과연 우리에게 어떤 힘이 있나? 또 나에겐? 그런 점에서 주체사상이란 것 또한 허수아비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고도 했다. 핵이라는 힘으로 큰소리를 치지만 자멸의 수순을 밟는 것일 뿐 공허한 과시에 불과하다. 강국들의 힘은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과시욕인들 다를 리 또한 없다.

솔직히 슬픈 한계에 관한 고통은 사람마다 감당하기엔 너무나 벅차 쓰라린 통증보다 더 날카롭다. 소스라치게 소름끼치는 경험들에 해당된 아픔이 그 정체다. 한마디로 힘의 한계, 지금이 마치 세계2차대전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과거처럼 세기적 경제공황에 가까운 금융파산의 쓰나미로 비틀거리는 풍전등화와 같다. 힘없는 나라들은 전쟁의 패잔병처럼 숨소리를 몰아쉬는 판국이다. 간단히 돈의 한계는 전쟁직전의 상황이다. 필경 총칼이 아니더라도 경제적 제물이 어떤 나라에서든 터질 것이다. 개인의 입장은 더욱 쓰리다. 가슴이 아린 것이다. 피부가 타 들어가는 고통, 후벼 파는 참담한 곤욕이다. 자존감의 상처까지 견뎌야하는 한계에 이르면 그것은 완연히 극과 극이다. 나라와는 달리 현대인들은 그래서 미치기 직전이다. 이미 미쳐서 죽어가고 있다.

「나는 죽었다」라는 명제를 찾아냈다.
뒤미처 나의 마음속에 확실하게 자리를 잡아가며 얻은 해답은 간단하다.
누구나 한계는 기정사실이다. 그것을 인정하고 이해할 수 있을 때, 그것을 전제로 그를 원망하고 탓하기보단 자신의 한계와 맞서 서로 감싸며 포옹하는 마음으로 함께 어울려 웃을 수 있는 곳에만 삶의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점을 실감하게 된 것이다. 「내가 죽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체적 죽음만이 죽음은 아니다. 당연히 상대방의 한계를 노리고 전쟁을 준비하는 전략적 차원의 입장에 있다면 그것은 곧 비극 그 자체라는 뜻이다. 적어도 나는 죽었지만 살아있다는 의미이자 이기주의를 떠난 전제이다.
게셀샤프트(Gesellschaft; 어떤 회사의 주식을 소유한 주주총회 회원이라든가, 무슨 신용카드로 조직된 망(網)속의 일원으로 자부하지만 인격과 관계없는 조건과의 관계. 가족과 같은 인간적 관계를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라고 해서 구분들을 한다.)에 해당하는 오늘날의 아파트촌에서 살아야하는 현대인의 삶에선 아마도 돈 놓고 돈 먹는 전투가 지속될 것이 분명하므로, 이 같은 논리는 가상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이일 공산이 크다. 인간의 유전자에는 아무리 위장해봤자 포식자라는 DNA가 엄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소 퀴퀴한 웅기로 감싸며 함께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다행이다. 가난한 사람일수록 그런 일이 더 많다. 지하철계단 동냥냄비에 동전이나 지전을 주는 사람들은 하여간 지식인들은 아니다.「나는 죽었다」라는 명제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다고 강조하는 내면엔 강강술래, 서로의 한계를 감싸 안아주는 마음으로 이어질 수 있는 길이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어서다.
하지만 솔직히 아직 그 실체를 명확히 모르고 있다. 불현듯 나는 이대로 떠날지도 모른다. 비워야 한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손을 꽉 잡고 힘껏 안아주어야겠다는 생각뿐이다. 나의 아내, 나의 손녀들, 그리고 나의 이웃과 마음 앓이들을 그렇게 말이다. 받아주고 아니고는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그것은 그들의 몫이다. 이타주의라든가 박애주의라는 어휘는 결코 쓰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돈이 인생의 전부라는 입장과는 천기간의 거리라 역시 쓰고 싶지 않다. 남의 얘기가 아니라 나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곤지곤지(坤地坤地;땅의 의미를 알게 하는 것) 슬픈 한계를 넘어가는 아리랑, 도리도리(道理道理) 잠잠(持闇持闇;쥘 줄 알았으면 놓을 줄도 알라는 뜻) 강강술래여..... 한계가 슬픈 게 하니라 자신의 한계를 모르겠다는 경우와, 한계 속에서나마 습관적 유기(遺棄)를 즐기는 것이 슬프다는 것이다. 몰라서 슬프고, 알면서 우물쩍 지능적 꼼수로 넘기는 습관이 더욱 슬프다. 그나저나 나라고 예외일거라 그렇게 믿을 만한 확증이 없다는 점에서 또한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