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개 부자와 벼락 거지
2021.01.18.
정신과의사 정동철
작심하고 원(圓)을 그려본다. 삼각자 가운데 뚫린 원 그대로 연필로 그린다. 확실한 원이다. 한편 같은 연필로 점(點)을 찍어본다. 여러 개를 찍는다. 볼펜으로 또 점을 찍는다. 원은 원대로 확실한 원이고 점은 점대로 모두가 크기와 모양이 똑 같다. 전자현미경으로 본다. 가상이다. 어찌 된 일인가, 원도 점도 하나같이 똑같은 것이 없다. 나노(10억분의 1m) 수준에서 보니 원호(圓弧)는 더욱 가관이다. 확실한 원호가 아니다. 마치 무한 다각(多角) 원호(圓弧)다. 이럴 수가.
둥근 보름달, 분명히 우리는 그걸 보며 살아왔다. 우주선을 탔다고 가정하자. 달을 향해 간다. 가까워질수록 둥글긴 하지만 완벽한 달이 아니다. 더 가까이 가니 마치 우주선에서 본 지구가 둥굴지만 그 지구상 내가 사는 곳에서 보면 산과 냇물 그리고 평야, 둥근 원은 어디에도 없다. 제법 높은 여객기에서 보면 내 고장은 둥그스레하다는 것을 어림한다. 대체 어찌된 일일까?
거시(巨視)세계와 미시(微視)세계 극과 극 그러나 모든 것은 미시세계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우린 안다. 빅뱅이란 것이 그러하니까. 망원경으로 앞의 친구를 보자. 코 앞인데 거꾸로 보면 멀리 동산쯤에 있다. 무엇이 진짜일까? 신문을 펼쳐본다. 내용인즉 중구난방이다. 사회면 특히 정치면은 극과 극 어디가 참인지 알 수가 없다. 기래기가 참인지 문빠가 참인지.. 혼란스럽다. 현실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자. 우린 현미경으로 세상을 보며 살지 않았다. 망원경을 보며 또한 세상을 살지도 않았다. 우리는 우리의 눈 바로 육안(肉眼)을 통해 보이는 대로 살았다. 육안으로 길들어진 삶, 그것이 설령 틀렸다 해도 기준은 육안으로 보인 것을 참이라 여겼다. 바로 상식, 그게 상식이라 했다. 정을 주고 받아오며 살아온 상식인 것이다. 놀랍게도 여기에 오만가지 미시 또는 거시 정보를 마구 비벼 섞어놓고는 알아서 판단해 살라고 한다. 특히 정치가의 얘기들이 그렇다. 헷갈린다. 이랬다저랬다 뭐가 뭔지 알 길이 없다. 그렇다고 과학적 미시나 거시세계를 바탕으로 한 객관적 주장이라면 모르지만 그렇지도 않다. 거듭 혼란스러운 것은 중구난방이라는 것뿐이다. 함에도 그 속에서 살아야 한다. 바로 세계 도처 정치 세계속 바보로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이다.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다. 그러나 상식은 무너졌지만 진실 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여론조사의 수치는 더욱 복잡하다. 참인지 아닌지 믿기 지가 않는다. 급기야 여기가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국가인가 사회주의 독재 국가인가 말들이 거칠어지고 있다. 견제와 균형, 사법부의 독립, 검찰의 독립, 그리고 정보사회의 독립을 강조하면서(문화일보, 래리 다이몬드, 2021.1.14.) 민주주의의 기본을 강조하기도 한다. 지금 여기 나의 관심은 정보사회의 독립성 여부다. 먹고 살려면 뭔가를 알아야 한다. 어떤 계층에 있든 그가 속한 곳에서 원하는 정보를 알고 있지 못하면 견딜 수 없다. 낙오된다. 문제는 그 정보란 것이 누군가의 어떤 권력에 의해 독점된다면 그 집단에 소속된 사람이 아니고선 먹고 살기가 힘겨워진다. 소문에 따라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월성 원전 방사선 물질에 해당한 폐기물 「삼중수소(三重水素)」가 유출됐다면 그것이 몸에 어떻게 해로운지는 생략되고 그렇다는 사실만 알면 족할 뿐이라고 한다. 물론 그 과학적 정체를 생활인이 알긴 어렵다. 장황하게 여기에 해설할 생각도 없다. 다만 우주의 75%가 수소로 흔하지만 육안적(거시적) 입장에서 살고있는 우리에겐 ‘수소차’ 정도로 족할 것이다. 문제는 힘으로 정보를 독점한 측에서 원전 폐기물의 방사선효과로 우리 몸이 망가진다는 점을 강조하기만 하면 어떻게 될까? 정부측 과학자는 물론 다 알고 있다. 핵심은 권력 구조의 의향에 따를 뿐이다. 주기율표의 1번이라든가 동의원소의 전자가 셋이면 삼중수소(三重水素), 댜양하게 쓰이고 있는 그의 양에 따라 몸이 망가질 수 있다는 것, 실제 폐기물 속에 어느 정도인지에 관한 독점적 해석은 그들만의 것이다. 이런 정보를 이용해 한 발 더 나가 제대로 감사(監査)를 못 해 국민에게 피해를 주었으니 물러나라 겁박한다 해도 대처할 힘이 있는지 그것이 문제다. 정보의 독점은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쓰이는가에 따라 엄청난 일들이 뒤따른다는 점이다.
「동학 개미」(국내 주식거래를 똘똘뭉쳐 거래하는 개인의 집단. 그들 모두가 천편일률적으로 성향이 같다는 뜻은 아니다. 미국주식을 중심으로 한 서학 개미도 있다.)가 증시에서 애국자 대우를 받는다. 삼천피를 달성해서 문 대통령이 자랑까지 했다. 돈도 많이 벌었다. 번개 부자 수준일 거란다. 간단히 넘어갈 일일까? 같은 개인이라도 포모증후군(FOMO 나만 외톨이, 해 말아 뒤따르다 빚투)으로 소문 따라 못난이 소외감과 울화를 면하려다 폭망, 결국 벼락 거지가 되어 버린다. 이미 주택문제로 벼락 거지가 깔린 형편 즉 빈부 차로 소란스런 사회적 갈등속에 또 다른 약자가 태어난다. 정보가 아니라 소문으로 덤빈 연유다. 결과 번개 부자가 된 「동학 개미」(물론 전부가 아니라 했다.)에 심통을 부린다. 그러나 역부족 사회적 갈등에 기름을 붓는 결과만 양산한다. 노사갈등, 빈부갈등, 지역갈등, 남녀갈등.. 온통 갈등으로 격차는 점점 벌어지는데 같은 개미로서 굴욕을 견디자니 힘겹다. 그나저나 동학 개미들은 대체 어떻게 정보를 얻고 자금의 출처는 어디였을까. 엄청난 단위의 돈, 그렇게 부자들이었나? 놀랍다.
완전한 원(圓)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거시세계와 미시세계의 차이점이다. 어느 쪽도 틀리지 않았고 맞지도 않았다는 것도 알게 됐다. 모양만이 아니다. 소문으로 거지가 되고 정보로 부자가 된다는 세계, 자본주의는 그렇다 치고 사회주의라면 예외일까? 전연 다른 얘기다. 공산주의에서 정보가 우선한다는 것은 조지 오웰의 대형으로 이미 알려 진지 오래다. 공산당선언의 칼 막스는 주식(株式)을 이용했고 자본주의 창시자 아담 스미스는 주식을 반기지 않았다. 자본주의의 꽃이라 하는데, 그래선지 북한만은 아예 주식시장이 없다. 사회주의를 지향(?)하려는 대한민국은 왜 주식에 열광하고 있을까. 넘치는 유동성 자금 때문? 없는 자를 위해 다양한 현금 배려가 기여했을 듯, 그럼에도 소득 격차 이른바 양극화는 더 벌어지고 있다. 안타깝다. 왜일까? 신흥부자가 권력 주변에 버섯처럼 자고 나면 넘친다. 냉정히 따지면 본시 사회주의적 좌파는 가짜였었는지도 모른다. 권력을 누리자 신흥 갑부가 된 셈이다. 감히 누가 막을 것인가, 그러나 여전히 좌파 사회주의자를 당당히 표방한다. 뿐인가 우파 보수주의자를 압박한다. 주식은 반드시 떨어질 때가 있다. 어떤 반응? 사회주의적 균등성에 따른 고요함? 자본주의적 자책과 화? 그나저나 특권에 의한 빈부 차에 의한 사회적 양극화와 갈등이 해소될 가능성은 확실히 있기는 한 걸까?
"`동학개미`는 애국자"…민주당 "공매도 금지 연장 고민해야"
https://www.edaily.co.kr/news/read?newsId=03230806628916736&mediaCodeNo=257
어는 여당 국회의원의 주장이다. “공매도는 과열 시장 진정이라는 순기능도 있다”면서도 “정부·여당은 역기능을 최소화하는 제도적 장치도 마련해왔지만 이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면 시장의 불안감을 잠재울 수 없다. 늦어도 1월 중엔 답을 내려 시장이 대비할 시간을 제공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왜였을까? 그뿐일까? 이 같은 주장의 배경에는 공매도 시장을 `기관과 외국인 투자자의 놀이터`라며 금지 연장을 주장하는 동학 개미들이 민주당 핵심 지지층인 `3040`인 점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 국회의원, “동학 개미는 단기 차익에만 목적을 둔 개인 투자자가 아닌, 대한민국의 미래와 K-뉴딜에 투자하는 미래 투자자, 애국 투자자”라며 “정치가 할 일은 분명하다. 풍성해진 유동성이 뉴딜 펀드와 미래 산업에 흐를 수 있도록 유인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정책이 이들의 기대 심리를 꺾어서는 안 된다”며 “당분간은 제도에 대한 불안 심리를 잠재워 뜨거워진 자본 시장이 실물로 이어질 수 있게 하자”고 촉구했다.
(https://www.edaily.co.kr/news/read?newsId=03230806628916736&mediaCodeNo=257)
포모증후군으로 뒤늦게 빚투, 좀 버는가 싶더니 폭탄 돌리기 앞에 공포, 동학 개미와 무슨 연고로 차이가 났나? ‘치명적 불평등’이란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코로나 19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강조된 표현, 코로나 19가 원인이 아니라 이미 있던 불평등이 표면으로 폭발된 것, 바로 양극화를 더 심화시킨 정보의 독점에 있을 것이다. 과연 공평한 사회라 주장해도 맞는 사회랄 수 있을까?
「21세기 자본」(토마 피케티 2013)에 등장한 그 치명적 불평등, 끔찍하다. 대한민국의 오늘엔 치명적 불평등 해소를 위한 숫한 인기정책으로 유동성 자금이 넘쳐 흐른다 했다. 그 소득은 누구에게 갈 것인가? 미래의 주인공들이 될 2030대를 찍어누를 빚더미로 이어진다면 지금 삼천피로 희희락락하는 동학 개미에 자부심을 갖는 것이 합당할까? 정보의 편식에 의한 불공평 그리고 공매도 방지(반 듯이 그들을 위해 그렇게 되리라는 보장은 없으나 또 다른 정보편식은?), 바로 그 대가가 빚으로 환원되어 짊어져야 할 짐이 된다면 얼마나 끔찍하고 서글픈가. 당연히 불안과 허탈감은 엎질러진 물감처럼 번질 것이다. 그 울화가 어떤 형태로 남게 될 것인지 예측불허다. 누굴 탓할 일인가? 그래서 해결될 일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다. 이제 입을 꽉 깨물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눈을 지긋이 감고 다져야 할 때다. 고통을 이기고 땀으로 대처하는 도리밖에 없다. 배워야 산다.
세계적 한국의 여자 골퍼들을 본다. 호화주택을 샀다고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대견해 보인다. 방탄이 거금을 배분받고 좋은 집에 살게 됐다. 누가 눈을 부라릴까. 축구로 초일류 자가용을 샀다. 역시 질시하나? 오히려 자랑스럽다. 엄청난 부(富)에 가난한 자신을 빗대 원망하지 않는다. 누가 봐도 객관적 부를 누리기 때문이다. 불공평, 치명적 불평등은 전연 가당치 않아 서다. 그들이 버는 돈에 대해 불공평이 아니라 오히려 환호한다면 답은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재능을 살려 노력과 인내란 의미가 거기에 실렸으니 답일 것이다. 자신의 재능과 피나는 노력의 대가가 공평한 가운데 얻어진 소득이란 의미다. 당연히 불공평한 특권에 따른 정보의 독식이 문제란 역설이다. 어떤 분야든 그것은 철칙이고 원칙일 것이다. 길은 바로 그곳에 있다.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가 할 일이다. 각자 자신의 인내와 노력의 대가를 최선의 정책적 가치체계로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이다. 갖은자를 향한 질시와 원망 그것을 버리고 자신의 노력과 인내와 끈기가 문제일 뿐이며, 위해서 정보의 독점을 편식토록 하는 권력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감? 자성할 일이 아니겠는가?
온당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부터 다시 다듬어야 할 것이다. 생각을 그렇게 갖자는 것이다. 스탠포드대학교 래리 다이아몬드의 주장, 매우 상식적이다. 삼권(三權)을 독점하지 않고 정보의 독립에 차단벽을 친다면 끝난다는 것이다. 정보의 독점, 바로 여기서부터 「번개 부자와 벼락 거지」가 갈린다는 사실, 경험적으로 체득됐고 지금도 생활 속의 난수표같이 어지럽지만 해결의 초점은 적시한 대로 국민과 정부가 하나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공정사회라면 코로나 19에 의한 잉여수입 자율 기부제가 거론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세금 제도는 왜 있는 것인가. 소득이 있는 곳에 걸맞는 세금이 있다는 상식 우리는 모두 익히 알고 있다. 대통령도 거든 이익공유제 옳은 것인가?
근원적으로 프로 골퍼나 축구선수처럼 만인이 보는 가운데 객관적 결과로 어마어마한 재산축적이 가능해 졌는데 그걸 몰수해야 하나? 우승상금을 독식하지 말고 나눠 갖도록 법을 만들자 할 때 공감할 사람 있을까?
백 마디 얘기가 왜 필요한가? 너도 나도 다 아는 것들, 아는 데로 가면 될 일이다. 몰라서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 위장한다면 그건 법으로도 다스려질 도리가 없을 것이다. 자신을 위해 자신에 의한 자신의 인생을 살면 되는 것 뿐이다. 뭘 더 강조해야 할까? 능력의 한계? 욕심? (2021.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