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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송이 꽃상여 덧글 0 | 조회 15,690 | 2009-06-27 00:00:00
정동철  


 

 


백만 송이 꽃상여


음력 섣달그믐(2009.1.25.)


 



상여가 나간다.


빨강, 노랑, 파랑 꽃상여가 딸랑딸랑 요령소리 맞춰 애간장 우려낼 듯 청승스럽고 애달픈 선소리꾼 사설 따라 나간다. 상주의 “애~고, 애~고”, 상두꾼 열두 명 “어허~ 어허~!” 애잔하게 뒤섞여 마지막 작별을 고할 새, 참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오락가락 드디어 떠나간다. 호상(好喪)이 분명하다. 흰 꽃이 아니라 3색 꽃상여로 미루어봐 오복을 누리다 떠나는 상여가 틀림없다. 적선(積善)은 물론 적덕(積德) 유호덕(攸好德)에, 장수, 부귀, 강령(康寧)과 그리고 객사나 사고사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에 둘려 쌓여, 당산신(堂山神)의 수호 받으며 고종명(考終命)하니 떠나간 이에 대해 보내는 마음 편하고, 떠나가신 이 역시 미련 없다는 뜻에서다. 흰 종이꽃대신 색종이 꽃 백송이가 치장될 수 있었기에 그렇다.


아! 「백만 송이 꽃상여」여!



상여가 떠날 시간은 누구에게나 정해진바 없다. 나의 연구실은 불행하게도 꽃상여를 탈 기한을 넘기고 있다. 섣달그믐까지 이른바 「뜨거운 세대(Hot Age)」에 관한 실험을 끝낼 수 없어서다. 나이로만 치면 호상에 한발 다가선 듯하다. 보내는 마음들이 족할 만큼 적선과 적덕이 충분한지 그게 문제다. 부귀영화 미련 없이 떠나는 처지도 아니다. 유산은 고사하고 떡 고몰 하나 남김없이 다 쓰고 떠나야 할 형편이라 꽃상여는 생각할 염치가 없다. 7일장의 토룡(土壟)이 아니라 생매장을 면할 길조차 보이지 않는다. 후손들의 심기를 뒤틀어 고려장으로 생매장될 조건에 딱 들어맞을 따름이다. 실험결과가 여의치 않으니 변명의 구실조차 없다. 박복한 현실이다.


요령잡이의 구성진 선소리는 본시 죽은 자에 대한 예송(禮訟)이며 그가 살아간 한평생을 희로애락으로 농축한 삶의 고백이자 위령(慰靈)의 노래다. 영가(靈歌)를 위한 진혼곡이었으련만 이승에서 삶을 기승전결(起承轉結)로 정리하고 저승세계에서 받게 될 심판내용까지 담겨있어, 산자를 위한 가르침이기도 하던 대사(大事)에 해당되는 커다란 지혜와 덕목이었을 진대, 너무나 거리가 멀어진 결과다. 원망만 거기에 있다. 애달프다. 사설과 후렴이 옹색하여 자리 잡을 구석마저 없다.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가 호상의 조건이 아니라 물려줄 재물을 후손이 필요할 때 요긴하게 쓸 수 있는 시기에 맞추어 떠나는 것이 바로 현대판 호상의 기준이 된 까닭이다. 자식들에게 가장 큰 선물은 일찍 죽는 것이라고 사르트르가 말했다는 이유와 잘 어울리는 뜻이다.



설상가상, 나의 인생 만년의 실험실은 계속 마무리는 고사하고 지루하게 진행되고 있다. 사회적 명예와 덕망은 야무진 꿈일 뿐이다.


새들러박사(Dr. William Sadler)는 「제3세대」라고 주장하다 이런저런 사례를 접하면서 은퇴 30년의 삶을 「뜨거운 세대(Hot Age)」에 해당한다고 규정지은 바 있다. 나는 그와는 상관없이 나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던 「노인과 호반의 눈안개」에 대한 실험을 설계하면서 거의 궤를 같이하는 이른바「6R」에 동의하게 되었다. 육체의 부활(Renewal), 원기회복 (Revitali- zation), 정신적 재생(Regeneration), 자아의 재발견(Rediscovery), 회춘(Rejuvenation), 그리고 인생의 방향전환(Redirection)은 너무 닮은꼴이다. 뿐만 아니라 각기 각 항목에 뒤따르는 여섯 가지 태도 또한 다르지 않기에 공감한다. 편의상 그의 주장을 빌리기로 한다.


가령 이들 세대의 공통점으로, 1) 자신이 원하는 진정한 삶이 무엇인가를 파악하고 있어, 젊었을  때의 돈, 명예, 지위등과는  달리 주로  내면적(內面的) 만족을 통해 육체적 부활을 추구 한다. 2) 과거에는 가족, 친구, 직장 등을 위해  살아 왔으나 이제  그들은 자기 자신(自身)을 위해 살아도 이기적이라 지탄받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스스로 원기왕성하다. 3) 그들은 은퇴 후에도 일을 계속하고 있다. 생계유지를 위한 일이 아니라 과거 하고 싶었던 일, 여가를 즐기는 가운데 정신적 재생을 꽤하고 있다. 4) 정신적 젊음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 그들은 긍정적 관심, 쾌활한 웃음, 즐거운 상상력을 발휘하며 자발적(自發的)이고 능동적 삶을 살고 있다. 5) 가족, 친척 이외에 더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며 베풀면서, 거기에 청춘의 행복을 되찾는 사람들이 많다. 끝으로 6) 그들은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과 죽음이 가까워 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항상 죽음에 대한 실존적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내 실험실의 경우 역시 거의 유사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문제는 은퇴 후 30년간의 뜨거운 시기(Hot Age)에 일하게 됐다는 대목에서 현실적 개념이 달라 덫에 걸려버린다는 점이 유다르다. 일할 수 있다는 것은 같다. 그 내용이 문제다. 생계를 위한 일이 아니라 베풀며 이웃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헌신적 입장과 그 순서가 뒤바뀐 것이다. 어쩌면 생계가 우선하는 것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헌신적 직업관」에 대비된 나의 주관적 표현이긴 하나 고려장으로 몰리는 이유와 직결되는 것이며 동시에 지리멸렬한 실험이 지속되고 있다는 결과이기도 하다.



TV에서 아흔을 바라보는 한 해녀가 물질을 한다. 바다가 편하다며 비틀거리는 바위 길과 「뜨거운 세대」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대조군을 웃기게 설정한 부분이 있지만 불과 70대 전반의 내가, 것도 병원(바다)에서 환자를 위해 일한다는 것이 헌신적인지 정확하지 않아서 하는 얘기다. 눈발이 펑펑 쏟아지는 외딴 산간의 노부부가 명절이라 기다리는 마음 애달프지만 찾아가야할 손들은 만고의 고생이다. 결과 고려장을 연상하게 하는 비약적 시나리오가 불거진다. 나의 현실이라고 큰 차이랄게 없으니 실험이 갈팡질팡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더라도 그들은 적어도 꽃상여의 주인공들이지 싶다. 진솔함, 위선이 없다는 이유다. 나 자신에 대한 실험은 그런 점에서 아리송하다. 가족, 손들의 주변을 끈질기게 맴돌고 있어서다.



서울을 떠날 때 정리가 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처자식을 위한 희생적 삶이나 환자를 위한 애절한 안타가음으로 못다 한 자신만의 하고픈 일을 할 수 있어야겠다는 마음,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직시하고, 과거로부터 자신을 위한 일로 전환하기로 작정한 것까지는 무난했다. 은퇴 후에도 일을 계속하고, 그럼으로써 정신적 젊음을 유지하는 가운데 가족, 친지 이외에 더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베풀고 거기에 행복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은 썩 빗나가지 않았다. 누구나 죽는다는 것은 물론 죽음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마음에서도 경포대 실험실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아주 멋져 노래를 부르고 싶을 정도다. 육체의 부활, 원기회복, 정신적 재생, 자아의 재발견, 회춘, 인생의 방향전환에 관한 대체적 실험은 그 윤곽에서 그럴 듯 했으며 거기에 자부심까지 느낀다. 그러나 결국 손들에 억매인 집착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은 물론 내가 보여준 뒤통수가 뻔뻔한 대머리 일뿐 삶의 진본(眞本)으로 남겨질 것이 궁색하다보니 주춤거리는 것이다.


진료에 몰두하는 일이 과연 헌신적이라 당당하게 주장할 자신이 있는가? 아흔을 바라보는 힘겨운 해녀의 물질이나, 너와집 눈 속의 팔십을 훌쩍 넘긴 삶의 숨찬 도끼질이 감동으로 포장되어 나의 실험실로 이끌려, 거기 이젤 위에 덧칠을 해 보지만, 난을 치는 동양화까지는 아니라도 유화의 숨소리마저 느끼기 힘들어 보인다. 다시 태어나도 정신과의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고 있으나 헌신적 사명감에서 머뭇거리게 된다는 의미다. 자녀를 위해 무엇을 해 왔는가라는 욕망이 다분히 겹쳐있는 까닭이기도하다.


상여를, 꽃상여를 탈수 없는 사유들이다. 마음은 당연히 가벼울 수 없다. 무원고립, 미래가 없는 우주고아가 되기까지 한다. 그것은 공중분해 되기 전 차라리 생을 스스로 정리하는 것이 더 값진 것이라 여기는 쪽으로 틀어지기도 한다. 걸리는 것은 아내다. 아내를 위한 꽃상여는 과연 보장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다. 본분종사(本分宗師), 성직자(聖職者) 또는 국가대표(國家代表)급의 헌신적 가치관을 갖은 분들의 이기적 자결은 일찍이 본바 없다. 외면할 빌미 없어 깊이 간직하려 고심하나 쉽지 않다.



실험은 정말 진지해야했다. 세심한 관찰로 진행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깨닫는다. 헌신으로부터 멀어진 사면초가, 진퇴유곡에서 마지막 한 수를 찾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의지는 그렇더라도 해내야 한다는 것, 요상한 이유로 안주만할 처지가 아니다. 그때다. 때에 세 가지 공식을 찾아낸다.


첫째, 매순간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리라는 것이다. 둘째, 그 현실이 분명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그것이 주는 원인적 의미를 간파할 수 있게 됨에 감사하며, 끝으로 알아차린 현실적 의미를 미래지향적 기회로 전환할 수 있는 지혜를 찾아야 되겠다는 사실들이 그것이다. 잔잔한 바다는 결코 노련한 뱃사람을 키워내지 못한다는 경험이 펄떡이는 근거일 것이다. 욕망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덜어내는 작업을 통해 가능하다는 뜻이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다. 천만다행이다. 오랫동안 마음에 자리 잡고 있던 「청춘」(사무엘 울만 Samuel Ullman,1840~1924이 78세에 쓴 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함)이 바탕에 있었던 연유일 것이다. 했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 훗날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염두하고 있어서다.


이것은 매우 값진 직관이다. 나의 훗날이 비록 꽃상여로 이어지지 못한다 해도 뜨거운 시기(Hot Age)를 스스로 충족하는 가운데 마무리 지을 수 있는 여분이 가능하리라 보는 것이다. 이것은 후손들의 입장이 어떠하든 그것들은 전적으로 나의 몫이 아니라는 것과 같다. 꽃상여는 오로지 내 마음 속에 상징적으로 존재할 뿐인 것이다.



⌜애고, 애고..... 어허, 어허........⌟


혼돈에서 출발한 나는 나의 원초적 혼돈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연에 순응하는 원칙이다. 호상의 개념이 어떻게 달라졌는가는 나와 상관없는 별개의 것이다. 그것은 망자(亡者)가 아니라 산자의 몫이다. 산자에 대한 고찰(考察)까지 내가 짊어져야 할 연구대상은 아니란 뜻이다. 상여의 출발시간은 KTX처럼 정해져있는 것이 아니기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선소리꾼 사설에 따라 한해를 넘긴다는 것이 마음에 살짝 걸린다. 마지막 길에 백송이 색 꽃상여에 오를 기회를 잃어서가 아니다. 한살이라도 더 먹으면 수학적 호상은 되겠지만 세상이 이해를 끝으로 날 버리려 한다. 이리저리 얽힌 사회적 마감시한에 이른 탓이다. 빨강, 노랑, 파랑 색종이로 치장한들 상여의 효율성이 퇴색된 터라 상여꾼의 소리 또한 횐 색 상여만큼 구성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요식행사에 묻혀 재생되는 진혼곡과 함께 산야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꽃상여를 탈수 없다함은 비록「청춘」이 버티고 있다 해도 다소 허망하긴 하다. 슬픈 것은 아니다. 죽어 넋을 잃은 뒤에 꽃상여나 흰 상여를 가리겠는가. 사후(死後) 영혼의 존재를 아예 믿지 않는 나에겐 문제의 핵심이 상여에 있는 것이 아니다. 죽음에 이르는 짧은 여생 중 들락거리던 욕망들로부터 확 트인 마음이 될 수 없어, 가지가지 뒤섞인 비애와 한들로 파란 하늘, 뜨거운 시기를 한 것 누릴 수 없게 된 연유라 그렇다.


떠밀려가는 「백만 송이 꽃상여」여!?


만남의 끝을 장식하는 숫한 표현방법 중에 ‘잘 있어요, 잘 가세요’, 그 방식 수 없이 많으련만 하필 꽃상여가 어른거릴까. 저무는 석양을 향해 이나저나 떠나는 꽃상여, 색과 숫자는 의미가 없다. 석양을 배경으로 드려진 밑그림이 흑백사진으로 뿌옇게 사라지는 모습만 눈에 흔들릴 뿐이다. 2009.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