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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심리 덧글 0 | 조회 17,086 | 2009-09-19 00:00:00
정동철  



임종 심리(臨終 心理) - 1980년대 초반의 글


 



지구를 뒤덮은 대홍수 때 온갖 동물이 노아의 방주로 다가왔다. 선(善)도 급히 달려왔다. 그러나 노아는 선(善)을 거절했다.


「나는 쌍(雙)밖에는 태워주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선(善)은 숲으로 돌아가 제 쌍이 될 상대를 찾았다. 선(善)은 악(惡)을 동반하고 배로 돌아왔다. 그 이후 선(善)이 있는 곳에 항상 악(惡)이 있게 되었다.


그래서다. 참이 있는 곳에 거짓이 있고, 신(神)이 잇는 곳에 불신(不神)이 깃 든다. 말(언)이 있는 곳에 침묵이 따르고, 삶이 있는 곳에 죽음이 늘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비극일까? 우리가 지금 절망해야 하는 것은 따라서 운명적이란 뜻인가?


그러나 키에르케고르가「인간은 정신」이라고 제시한 것이 참이라면 정신이 존재하는 한 그 역(逆)의 공리(公理)가 우리에게 어떤 구원의 손길을 펼쳐 줄 수도 있다.


「죽음이 있는 곳에 삶이 또한 숨쉬고 있으리라.」


과연 사색의 맥은 빗나가지 않았다. 릴케로 하여금「죽음이 삶 안에 있다」며 인생을 읊게 한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보라! 죽음이 삶 안에 있다.


둘이 서로 얽혀서 달린다.


마치 천 속에서 실오라기들이 감겨서 달리듯


어떤 사람이 숨 거두는 것, 그것만이 죽음은 아니다.


사람이 숨쉬고 있어도 죽음은 있다. 많은 것이 죽음이다.


우리는 그것을 감추지 못한다.


우리 속에는 언제나 죽음과 탄생이 있다.



더불어「죽음에의 존재뿐 그것이 실존」이라고 하이데거가 주장한 것은 전적으로 릴케의 영향일 것이라 한 것은 실감적이다.


죽음? 그러나 죽음은 무엇인가?


선(善)인가 악(惡)인가? 참인가 거짓인가?


철학과 종교는 각기 죽음을 해명하고 있건만 실상 우린 죽음 앞에 모두 떨며 공포에 질려 있는 실정이다. 우린, 아니 나는 죽음을 정말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의사에게 있어서 죽음은 더욱 절망이다. 환자의 죽음은 그것이 무엇인가에 앞서 실로 의사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간다. 의사에게 죽음은 거짓이며, 의사에게 있어서 죽음은 악이고 곧「말하는 침묵」이기 때문이다.


비록 식물인간이 되었을지라도 그의 부모의 간곡한 탄원을 무시하고 산소 마스크를 떼려하지 않는 일방통행 사고방식에 삶이 강요되어 세뇌(洗腦)된 탓일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의사에겐 자살율이 높게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게도 거짓이며 악이며 절망인 죽음을 치료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새로운 사명을 의사에게 던져 주었다. 이름하여 임종 환자(臨終 患者)의 치료란 것이다. 병의 호전 과정을 정확히 알 수 있듯 어떤 병의 죽음으로서의 타임 스케줄을 세밀히 알아버린 무화과(無花果)의 비밀 때문에 이 비극적 치료에 의사가 가담하지 않으면 안될 운명을 자초한 셈이다. 마치 임종을 찬미하며 재촉이라도 하듯 그렇게 말이다.


“선생님 왜 내가 예민해졌는지 아시겠어요? 체중이 25kg이나 줄었어요. 전과 달리 목사님이 한 주에 두 번씩 꼭 찾아옵니다. 시어머니 또한 그 어느 때보다 날 중히 대해 주는군요. 선생님이라면 이상하지 않을 까요? 뭘 뜻하는 얘기죠? 어떤 식이든 잘못돼 간다는 그런 말이 아닌가요? 네 선생님! 그렇죠?”


유방암으로 임종을 향하는 부인(婦人)과의 대화가 여기까지 왔을 때, 다음에 의사가 할 수 있는 말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옳습니다. 안됐군요.”


“아니 그건 잘못 알고 계신 겁니다. 이렇게 좋아져 곧 회복될 터인데요.”


“……”


진실과 거짓, 아니면 침묵 중 택일이 기다린다. 이때 진실은 선(善)이고 거짓은 악(惡)일까? 침묵은 무엇인가? 선(善)도 되고 악(惡)도 되는 것일까? 해답은 아무도 일러주지 않는다. 오로지 환자가 묵시적으로 말해 줄뿐이다. 결정은 의사가 그 뜻을 알아차려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괴로움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의사가 된 것을 후회해 봤자 이미 소용없는 고민이다. 소금을 안주로 들이키는 소주와 담배가 범벅이 된다해도 해답의 실마리는 임종 환자의 심리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임종 환자의 심리에는 실상 몇 단계의 특정적 과정이 있음이 밝혀져 있다.


첫 단계는 충격에 의한 거부(拒否) 현상이다.


두 번째는 분노(忿怒),


셋째 단계는 흥정,


네 번째는 절망에 의한 우울(憂鬱)함,


마지막 다섯 번째 단계엔 죽음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는 그런 심리가 담담하게 기다린다. 의사의 대답이 택일될 수 있는 배경들이다.


심리적 단계가 어디에 속해 있든 불치의 병으로 확진(確診)되고 그로부터 소생될 길이 없다고 단정되면 그때 그는 임종 환자로 호칭된다. 그후 최종의 운명이란 중미(中尾)에 이르기까지 몇 개의 죽음을 통과한다. 사회적(社會的), 심리적(心理的), 육체적(肉體的) 죽음이 차례로 결정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행사(行事)해 오던 여러 가지 사회적 역할과 기능을 잃게되고 이어 정신적 판단 능력의 상실을 통해 의지와 책임이 인정될 수 없게 된다. 결국 육체적 죽음으로써 식물인간이 되어 버린다. 뇌와 심장이 살아 있다는 것 이외 모든 기능이 없어진 상태이다. 따라서 임종 심리의 반응과 이렇듯 차원을 달리하는 죽음들 사이의 여러 가지 관계가 그의 운명을 달리하게 됨을 알 수 있게 된다.


환언한다. 논리상 일단 임종 환자가 된 이상 가급적 사회적 죽음이 연장되기를 바랄 것이고 아울러 그때까지 심리적 죽음이 없기를 기대한다. 문제는 환자 자신이 진실 된 자신의 상태를 알아야 한다는 문제점에 걸리고 만다. 환자에게 사실을 알려주어야 한다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것이 얼마나 수월치 못한 일인가는 너무나 확실하다. 뿐만 아니라 진실이 환자에게 전달됐다 하더라도 그의 심리가 이 운명적 사실을 어느 시점에 가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느냐는 것은 전연 미지의 것이다. 때에 따라서는 알려진 순간 불행하게도 사회적이며 심리적 죽음이 앞당겨 폭발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알려주지 않음만 못한 결과다. 의사의 역할이 힘겹고 괴로운 것은 이 때문이다. 차라리 사회가 요구하는 컴퓨터 의사로서 기계적 결론을 밝혀 주는 일로써만 그칠 수 있다면 아픔은 적을 것이다.


환자가 죽었을 때 컴퓨터같은 역할을 못한 의사는 오진(誤診)이란 누명으로 구속되고, 반면 임종을 컴퓨터같이 내리면 예외 없이 비정(非情)하다고 비난한다. 의사가 설자리는 불신(不信)의 눈총이 겨냥하고 있는 자리뿐이다. 진퇴유곡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누구를 탓하거나 호소할 형편도 아니다. 바로 그런 현상들이 하나의 병적 중상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모든 고통을 의사 편에서 흡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의사가 된 이상 고통은 어차피 필연적이다. 치료자란 본시 안락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것은 어쩔 수 없다. 해야 할 일은 임종 환자와 그 가족에게 어떤 결정이 가장 알 맞는 결과가 될 수 있겠느냐 하는 것뿐이다. 임종 심리는 그런 뜻에서 좀더 소상히 따져볼 의미가 있다.


죽는다는 사실 앞에 충격을 받지 않을 사람은 없다. 내가 죽는다는 것, 어버이가, 아내가, 남편이, 귀여운 자식이 죽는다는 것에 초연할 수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비록 어지러운 세태에서 비명에 간 수다한 죽음을 보아 익숙해졌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타인의 일일 뿐 결코 나의, 우리의 것으로 체험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가능성은 철저하게 부정되어 왔을 것이다. 따라서 죽음이란 엄청난 총격 앞에 그것을 부정하려는 심리는 거의 자연스런 것이거나 반사적이다.


「오! 노!........」


케네디가 총탄에 쓸어 질 때 그 부인의 반사적 표현이 무엇을 말하는가.


환자가 철저하게 진단을 부정해 버리는 것은 결국 당연하다. 그것은 오진이며 그것은 자기의 병명이 아닐 거라고 우기는 것도 있음직하다. 이런 현상은 사람에 따라 길 수도 짧을 수도 있다. 강렬한가 아닌가 도 그 사람의 평소의 성격에 따라 좌우된다. 항시 자기만이 옳고 자기만이 절대적이라고 믿는 오만한 독재자 적 성격일수록 부정과 불신의 태도는 강하며 오래 지속될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시간은 그러나 부정(否定)으로 일관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 눈앞에 전개되어가고 있다. 환자의 마음은 격노(激怒)하게 된다.


“왜 내가? 어째서 내가 이런 병에 걸려야 한단 말인가? 아니 왜 그것을 고칠 수 없는가!”


그는 분통을 참을 수가 없다. 의사에게, 가족과 친지와 인생에게, 더 나아가 신(神)에게 화를 낼 것이다. 너무도 불공평한 운명에 분노를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역시 인생을 자기 본위로 믿고 살던 위선자일수록 이 분노는 강렬하게 나타난다. 그런 사람들 중엔 끝내 부정(否定)과 격노(激怒) 속에 생을 마치고 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침묵과 성실한 보조적 치료 행위가 금(金)일 뿐이다. 어쩔 수 없이 거짓 위로가 필요할 때가 있어야하는 경우다.


대부분의 인간은 그러나 약하다. 제3단계의 흥정이 마음속에 넘나들기 시작한다.「그래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하면서 몇 년만 더 살 수 있길 갈망한다.「아들놈이 결혼할 때까지만...」,「딸이 졸업할 때까지만...」하며 간곡히 흥정을 하는 것이다. 어쩌면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며 그 동안 허리띠를 조이며 입을 것 입지 않고 쌓아왔던 재물(財物)을 다 바쳐서라도 가능한 거래(去來)를 해본다. 덕분에 절이 시정으로 내려오고 교회가 웅장하게 높아지며 한편 사이비 의료 업자의 배가 불러지지만 그의 가족이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는 뒷전이다. 가난한 자의 죽음이 천국에 가깝다는 뜻은 이 요상한 흥정이 없기 때문일까?


하지만 모든 흥정엔 한계가 있는 법이다. 이제 흥정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현실로 점차 굳어가고 확실해지며 따라서 절망과 비통함이 자욱하게 스며든다. 대항할 기력이 없어지는 것이다. 비통한 심정에 빠져 든다.


엄연한 사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 나는 죽어야 하는구나!


절망한다. 차라리 자살로 돌파구를 선택할 수도 있다.


어차피 갈 사람인 바에야 가족과 자신을 위해 하루라도 빨리 가겠다는 결심이 굳혀진다. 극히 병적 인격에선 가족과 더불어 집단 자살을 꾀하기도 한다. 나와 가족, 나와 집단, 나와 국민을 구별하지 못하는 유아독존적 사고방식이 착각을 잉태하게 된 매우 위험한 결과다. 어떤 종교단체의 광적인 집단 자살도 알고 보면 교주의 운명이 사회적 종말에 이르렀을 때 나타나는 병적 좌절감의 표현이라 견주어 볼 수 있다. 치료자의 역할이 극히 중요한 시기에 접어든다.


최종의 단계는 정신적으로 일상의 건강을 지녔던 사람에 가능하다.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며 거기 최선의 방법으로 대처하려는 태도, 이른바 담담히 초연한 상태로 그의 마지막 주권(主權)을 무리 없이 행사하려는 결단이 이루어진다. 그것은 내용에 있어서 모두 같아야 할 이유는 없다. 아니 같을 수가 없다. 그것은 그 사람 특유의 것으로 결정되어야 함뿐이다.


결국 자신의 운명을 가납(嘉納)할 수 있게 됐다면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도와준 치료자가 곧 훌륭한 의사가 된다. 이것은 죽게 된다는 사실을 인지하도록 강요하는 것과는 전연 성질이 다르다. 말을 바꾸어 거부 현상과 분노와 흥정 사이를 맴돌며 방황하면서 시간과 재산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는 건강한 환자(?)로 치료했다는 뜻이 된다.


어설픈 대처로 졸지에 사회적 죽음과 신체적 운명이 동시에 중첩되어 요절(또는 자살)하게 된다면 그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말하는 침묵」의 소중함이 의사에게 철저하게 요구되는 이유이다.


임종 환자의 치료는 이와 같은 임종 심리를 정확히 파악한 상태에서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고 잔존한 갈등을 해소하며 못 다한 희망을 들어주면서 그 환자만이 통할 수 있는 특수적 입장을 취해 나가야 가능해진다.


그래서 왕진 면담 치료가 바람직한 분위기이다. 그러나 솔직히 임종 환자를 위한 가장 이상적 방법이란 있을 수 없을지 모른다. 그것은 죽음과 삶, 진실과 거짓, 선과 악의 해명이 확연히 주어지지 않는 한 어쩔 수 없는 숙명이라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 그 죽음이 의사인「나」자신으로 올 때 과연 나는 죽음을 초연히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는 대목에 이르면 그 최선의 방법이 어떤 것일지 묘연해 질뿐이다.


의사의 고통과 의사의 죽음을 치료해 줄 사람은 누구일까? 얼핏 그것은 곧 종교라고 답하겠지만 그러나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보장은 아직 없다.


당연히 임종의 심리는 모르는 것보다 사전(事前)에 알고 있을 때 우린 임종에 대처하는 지혜를 간직할 수 있다. 선악이 쌓이듯이 공원 묘지에서 우린 언제나 숨을 같이 쉬고 있는 생사의 쌍(雙)을 발견하는 것처럼 우린 죽음을 가까이 대할 수도 있다.


어쩌면 부정과 격노를 재빨리 넘어 숙명을 알아차려 유한한 인생 속의 사회적 삶과 정신적 삶의 진정한 주인공이 될 가능성을 배울 수 있다. 선과 악, 그런 점에 서서 이들은 생사 앞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며 다만 재산과 명예와 권력과의 투쟁에서 자빠지거나 넘어뜨리는 수다한 인생들이 애처롭게 임종 심리를 도용하면서까지 죽음 앞에 구제되길 기대하는 인생을 볼 때 거기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게 되는 것, 그것이 불행히도 모든 우리의 현실이란 점이다.



내 눈빛을 꺼주시오. 내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아주시오 내 당신의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걷지 않고서도 당신에게 갈 수 있고 입 없이도 당신에게 약속할 수 있습니다.


………


뇌(腦) 속에 당신이 불을 던지신다면,


내 피 속에서 당신을 실어버릴 것입니다.­「내 눈빛을 꺼주시오」­릴케


(주: 1979년 1월 한국 최초로 ‘臨終患者의 治療’란 綜設로 필자가 정신의학보에 실린 것을 중심으로 쓴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