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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지식 덧글 0 | 조회 17,042 | 2009-09-19 00:00:00
정동철  



돈과 지식- 75년



1


은행가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인간을 세 개의 카데고리로 나눈다. 즉 돈을 아주 많이 가진 사람과, 전혀 갖지 못한 사람, 그리고 약간 갖고 있는 사람.


돈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가진 것을 보존하고 싶어한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 또 돈을 전혀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이 갖지 못한 것을 얻기를 원한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현재의 질서를 파괴하고 그들에게 유리한 새로운 질서를 하나 세우는 것이다.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은 현실주의자들이다. 그런데 세 번째 종류의 사람들, 즉 돈을 약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그 약간의 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사회질서를 보존하며, 동시에 그들이 아직 갖지 못한 것을 얻기 위해 사회질서를 뒤엎으려 한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들이 관념상 파괴하는 것을 사실상 보존하고 있고 그들이 보존하는 체하는 것을 사실상 파괴하고 있다.」


사르트르가 쓴 희곡 《악마와 선신(善神), 1951》에서 인용된 말이다.



2


현대 경제 이론이 어떻게 되어 있든 갖고 싶어하는 사람에 비해 물량이 모자라는 것을 기술적으로 고루 공감이 가게 하는 방법은 그리 쉬운 게 아닐 게다. 따라서 재분배(再分配)의 힘겹고 마음 아픈 이론들이 그럴듯하게 여기저기 강요되고 있는가 싶다.


수입(收入)이 가계부에 붉은 글씨로 허덕이는 대부분의 연탄재(주: 해방 전 집 뒷벽으로 둘러 쌓인 장작처럼 70년대엔 연탄이 그득히 쌓인 집이 부자였다. 연탄 보일러에 하루 12장 이상이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겨울철 사망률의 고지(高地)를 차지하든 연탄 중독을 피할 수가 있었다) 인생 생활은 내일을 향하는 의지로 생의 뜻을 읽는다.


흑자 인생은 또 그 나름대로 기부와 희사(喜捨)를 아끼지 않고 사회사업을 하여 장학생을 키워 보람되게 살려고 애쓰기 때문에 먹는 밥 세끼는 같아도 즐거움이 있다. 가진 자와 없는 사람의 삶이다.


내가 소속했던 어떤 모임에서는 박수 한 번 칠 때마다 백원을 내야 하는 곳이 있었다.(주: 로터리클럽은 매주 같은 요일 낮에 점심을 함께 하면서 이른바 지도층을 자처하고 있는 모임이었다. 지금은 여성 파워가 커 옛날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마치 섰다 꾼들 처럼 돈지갑을 아예 식탁 위에 내보이고 한 푼씩 성금 바구니에 집어던진다. 아무도 부담 없이 그리곤 누군가가 제의를 하면 또 5백원, 천 원 포커 판의 레이스같이 바구니의 돈은 수북해지기 마련이다.


재분배의 한 형식이다. 능력이 얼마이든 하여간 누구엔 가로 돌려 보내진다. 그래서 좋다. 바람직한 인간의 두뇌 과시다. 같이 살아야 하는 운명적 현실을 그런 데로 알고 있어 비롯된 착상이다.


재분배가 제도적으로 명문화돼 있는 것은 물론 세금이다. 누진세를 바탕으로 한 종합소득세가 바로 그것이다. 좋은 제도다.


그러나 적자 인생은 의욕으로 살고, 흑자 인생은 재분배의 기쁨으로 산다면 과연 나는 무엇을 재분배해야 할까?


해야 한다는 생각부터가 주제 넘는 착각임을 모르는 바 아니다. 나에겐 돈이 없다. 나에겐 권력이 없다. 나에겐 주먹도 없는 것이다.



3


나는 정치가가 아니어서인지 지미 카터(주:1924.10.1.~현재, 미국 제39대 대통령, ‘나이 드는 것의 미덕’을 썼고 이웃 사랑을 강조하면서 ‘사랑의 집 짓기 운동’을 펼침.)보다는 그의 어머니에 관심이 쏠린다.


「왜 최선을 다하지 않는가?」라는 카터의 자서전 속에 그의 어머니 릴리안 여사가 하루 12시간씩 간호원으로 젊은 시절을 보내고도, 그후 70고령까지 인도에서 평화 봉사단으로 일해온 기록이 꽤나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일한다는 것은 그만한 대가(代價)가 없어서도 안되겠지만 그렇다고 대가만 염두에 두게 되면 실상 권태롭고 힘겹고 짜증스러워 비참한 기분에 휩싸이기 십상이다.


일에 정말 즐거움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 일단 일에 임하면 철저하게 몰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거의 일한다는 것이 하나의 운명적인 것처럼 그렇게 신들린 사람들 말이다.


거머리에 피를 빨리며 벼를 심는 농부가 그 순간에 수확(收穫)에 의한 돈에 매달리진 않는다.


묵직한 선반(旋盤) 회전 추를 따라 불꽃 튀는 쇠 깎임을 좇는 공원(工員)의 뜨거운 순간이 또한 돈으로 아물거려지지 않는다.


환자의 생명을 떠받든 수술실 의사의 마음이 돈으로 저울 질 되지 않으며, 정신요법의 대화에서 또한 일일이 돈이 측정되는 것도 아니다.


주부가 아이를 키우고 살림을 하면서 그 노동력이 몇백, 몇 천 원에 해당될 것이라 가늠한다면 벌써 일의 맛을 송두리째 빼앗기듯(주: 2001년 현재 주부의 월봉을 환산하여 적어도 백 만원 이상이라고 주장하는 가운데 뭔가 변하고 있긴 하다.) 우리들 대부분은 따라서 오로지 일에 열중하고 산다.



잠에서 꿈을 꾸니 인생은 기쁨,


불현듯 눈을 떠 바라보니 인생은 의무!


일어나 행동하니 의무는 곧 즐거움이라.



타고르의 시 또한 조용히 일의 의미를, 인생의 뜻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정말 필요한 일을 주고 그것을 떳떳하게 할 수 있는 그런 세상에 지금 우리가 마음 편히 살고 있는지는 미지수다.



4


나는 어떤 계층에 속해 있는 것일까?


나는 재분배의 능력이 없는 것일까?


나는 과연 일의 의미를 터득했을까?


아직도 나는 돈을 모른다.


때로는 추악하다고 분통을 터뜨리다가도 또 때로는 파안대소 하늘을 날 듯 돈의 위력을 만끽한다. 국가적 차원에서 볼 때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 나라만의 지상 목표는 아니다. 사상의 벽을 넘어서까지 공통의 목표가 되어 전쟁이 불붙는 형국이니 개인의 생리가 달라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당연한 변덕일 수밖에 없다. 돈의 선악을 따진다는 것은 그러므로 아주 어리석은 일에 불과할 따름이다.


문제는 돈의 행방과 질서의 관계가 어떻게 유지되며 그 속에 숨쉬는 우리가 무엇을 향해 나아갈 것인지가 중요할 것이다.


미카엘 뢰비는 말한다.


「지식인․작가․시인․학자 등은 모두 질적(質的) 가치에 지배되는 세계에서 산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는 양적(量的) 가치, 다시 말해서 교환가치에 엄격히 지배된다.


한 화가에게 있어서 한 장의 그림이란 무엇보다도 아름답고 빛나며 어떤 이야기인가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에 있어서 이것은 우선 하나의 상품으로서의 물질 그것뿐이다. 그것은 질적 가치와 양적인 가치와의 대립이며, 또 논리적 혹은 미학적(美學的) 가치와 돈과의 대립이다. 모든 문화적 자산, 감정, 도덕적 원칙, 미학적 정서 등이 시장에서 적정 가격하에 거래되는 상품으로 전락된다면 바로 이와 같은 모든 위협에 지식인은 반항하게 되는 것이다.」


의술(醫術)의 앞날은 이런 점에서 불길한 예감이 든다.(주: 2000년 드디어 의약 분업으로 의술은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악의 집단으로 매도되고 동시에 기계적 치료 기능공으로 전락되었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지식인은 지배 계층과 하층민 사이에 끼어 어느 쪽에도 속해 있지 않은 애매한 중간층이라 했다. 가진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중간 치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말은 빼앗기를 원치 않으면서 더 갖기를 갈구하는 그런 중간층을 대변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면 문제다. 터득한 일을 통해, 대중의 구체적 보편성을 알고, 재분배 할 수 있는 용기를 갖고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참뜻이 포함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5


모름지기 나는 일을 하리라.


이유를 묻지 않고 일을 하리라. 두 가지, 세 가지가 함께 밀려와도 또한 일을 하리라.


진료라고 하는 예술의 분배가 구체적 보편성의 사랑과 더불어 아직 나에겐 고갈됨이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