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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지면 짧아지리 덧글 0 | 조회 1,295 | 2021-03-01 00:00:00
관리자  

쎄지면 짧아지리

2021.03.01.

정신과의사 정동철

 

 

힘 쎄 질수록 명()은 짧아진다. 많으면 많아질수록 작아진다. 숫놈의 생명만? 아니다, 그렇다고 작으면 작아질수록 쎄 지거나 커진다는 보장은 더욱 없다.

너무나 황홀했다. 일상(日常)이상의 절정의 극치(極致), 삶의 원동력 그것은 오직 나 자신만의 개인사로 차별성을 기록하기에 충분했다. 놀랍다. 기발한 꿈 때문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러나 바로 그 극치 자체가 아니다. 지구상 모든 인간 누구에게나 그것은 전연 같은 규모의 크기로 여백 없이 똑같다는 사실, 그 기쁨 그 희열(喜悅) 그 극치감은 정확하게 같은 수준으로 평등하도록 우주 법칙이 이미 설정되어 있음이다. 동물도 예외가 아니다. 사람에겐 발상의 돌출성으로 예상 이상의 결과를 얻곤 한다.(사람과 동물을 인위적으로 구분한다는 전제) 놀이형태의 비 연속성(連續性) 비 정기성(定期性), 오로지 유희적일 경우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이치가 유일한 특징이다. 동물은 언제나 진지하다. 이 놀라운 희열과 활력으로 파생될 효과는 인간에겐 언제나 예상을 뛰어넘는다. 분명하다. 지구상 모든 인간에 공통분모로 존재한다는 사실, 평등 균일(平等均一), 정말 놀랍지 않은가? 임금이나 백성, 별명이 있든 없든 삶의 원리(原理)가 똑같이 내재 된 이유 말이다.

 

1

 

세 사람과 반려(伴侶)견 세 마리가 동시에 거실을 점령했다. 특별히 미워할 이유도 그렇다고 좋아할 까닭도 없는 존재들 반려란 자체가 나에겐 매우 낯설다. 생활방식의 변화는 불가피 리듬에 영향만 없기를 강조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집중력이 희미해지더니 결국, 생각이 멈췄다. 이상하다. 왜지?

다행한 건 분명 둘 중 하나임을 알았음이다. 내 편 아니면 적()이란 관계가 그것이다. 얼치기 중간은 없다. 제법 뻐기고 자랑하던 반려인간, 오만가지 언어를 구사하면서 2의 몇 제곱에 해당할지 알 수 없는 표현력. 분명한 건 마음이 실린 높은 수준의 연관성과 매우 관계가 깊다. 따라서 법()은 증식한다.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정의는 줄어든다(Much Law, Low Justice)고 충고하니 헷갈린다. 그러나 법은 법이다. 반려견은 다르다. 모 아니면 도. 문제는 어떤 점에서 반려역할을 하고 있음인지 명확지는 않다. 핵심은 인간이다. 반려인간 말이다. 개보다 훨 반려 관계 맞나? 그 많은 법과 민심이 일치되어 있느냐는 것이다.

 

2

무수히 날아드는 작고 많은 별들의 먼지 같은 부스러기들, 아니 그 진본(眞本)들이 모여 별이 됐을 바로 미립자(微粒子)들 때문일 것이다. 지구상 70억 인구 개개인의 기본구조 원자(原子)를 몽땅 모아보자. 딱 사과하나에 해당한 크기란다. 그게 참이라면 대체 그 원자(原子)의 핵은 무슨 연유로 우주의 주인공이 되었는지 난감하다. 과학자의 얘기이나 만고(萬古)의 우주 법칙, 놀랄 뿐이다. 오스만 합스부르크 제국의 왕계(王系) 650년간을 보면 원래 턱돌이에 오리(인생 末路)였을까? 왕가의 유전자를 지키기 위해 괴팍한 성격의 유전은 모르쇠 가내(家內) ()까지 불사했다. 결과 망했다. 1980년대 후반, ‘91년 구소련이 망하기 전 세르비아의 한 대로 모퉁이에 각인된 발자국 위에 서서 다시 생각했던 나, 별났던가? 드디어 그 어마어마한 초대형 경련성 쾌감은 주걱턱 왕들의 합스부르크 제국의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암살을 당하자(1914,6,28.) 세계 제1차대전의 단초가 되었다. 인간은 더 이상 그 이전의 인간이 아니다. AI가 아니더라도 이미 혼()은 없고 기계화 됐거나 되어가고 있다.

초 극성(極性) 황홀경 우주의 끝은 어차피 인간계()의 영역 밖이다. 그 미치도록 발작적 함성들은 엄청나기로 너무 가공하니 설명할 길이 난감하다. 다행히 지구상 인간 모두에게 수억 년의 공통분모로 꼭 임금만 초월적 기쁨을 누릴 수 없는 것, 해서 우린 삶의 의미쯤 허공에 날리며 모두는 너무나 미시세계 표현의 나락으로 떨어져 기계화된 공정성만 우기며 아웅다웅 살고 있는 중이다.

 

3

 

그래서다.

아인슈타인이 광자(光子)를 통해 전자(電子)를 튕겨내어 노벨상을 받았지만(光電效果,1921) 그의 통일장이론(統一場理論)은 끝을 보지 못했다. 모두는 인간이 갖는 언어로 포장돼 희로애락을 내키는 대로 제단 할 뿐 동물계의 내 편 아니면 적()처럼 지금은 바로 그 원칙과 너무나 다름없이 진행 중이라서다. 본시 인간의 끝은 누구나 오리처럼 뒤퉁거려야 했다. 세르비아에 남겨진 흔적 그 발자국 거기 서서 지금 그 시절을 재음미했던 미묘한 기분, 묘하게도 궁궐 같은 호화 속에 만년 왕국 그려 보겠지만 생명의 한계만은 피할 길? 없다는 것이다.

가덕공항이 부산의 동남권 메가시티로 찬양받겠다는 날, 그 희열은 예비타당성조사도 건너뛰었으니 행여 그 바다를 믿을 수만 있을까? 그렇게 찬양했던 주인공들의 미래는 통일장이론처럼 묘연해지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겠나? 기쁨, 희열, 초미시 초극(超極) 세계는 불행한 듯 다행스럽게 지구상 모든 인간에 공통 배정된 결론, 지구상 예외가 있었던가? 나라고 예외? 너무나 공정하기에 뒤퉁거리는 오리 본색으로 향한 노골적 비아냥, 나이 들어 만인 공통의 끝을 맞게 되어가니 뭐라 해야 할 건가? 다행이라고? 그런가? 다행일 것이다.

문제는 씰룩거림이나 언행 자체가 아니다. 뭉크의 절규(The Scream, 1893)에 그려진 낙서, “미친 사람만이 그릴 수 있다(Can only have been painted by a Madman“-노르웨이 국립미술관 큐레이터 마이브리트 굴렝에 의해 밝혀짐. 2021.02.22.)고 가능할 거란 속내에 감춰진 미묘한 전략? 속고 속은 우리들 또 얼마나 속아야 하는 걸까? 당연히 누구나 닥칠 만민(萬民)의 끝은 오리 궁둥이(Lame Duck)’라는 숙명을 감수해야 할 것이니 과연 어디를 노크해야 할지가 실로 문제다.

 

3.1절이다. 관청이 가로등에 건 태극기 유난히 펄럭거린다.(이틀 전) 뭘 생각하며 어딜 바라보라는 것일까? “동남권 메가시티는 대한민국 성공 전략이라고 들썩거리는 민심, 과연 오등(吾等)은 자()에 아()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하노라..” 바로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떠올릴까? 어쩌면 탐욕과 무능의 다수가 결정한 장미향(薔薇香)에 취해 가시밭길 엉겅퀴 마다않고 가야 할 길로 나섰던 조상들의 소망은 잊혀지지 않았을까? 골머리 쾅, 생각일랑 잠깐, 신세대처럼 명품부터 사고 보자는 손길 따라 느낀 대로 선택하면 되리라고? 갚아야 할 2030대 미래의 그 엄청난 빚 그건 그때 가서 결정할 일이라 하니 자고 나면 쏟아지는 법은 당연? 마치 쿵짝~ 장단 맞추기만 같다.

오호통제라, 늙어 비틀어진 멍청한 꼰대, 제발 조용하시라? “할머니, 날 몰라보시면 내가 알아 잘 지켜 드리면 되지일본의 10오랜지 팔찌치매(인지증) 서포터’ 325만 명(DongA.com’21.2.27), 한국? 노령화 세계 1위 곧 생기겠지. 할 말 무지 넘쳐 가슴 미어지지만 들을 사람 없음에 봉하리라. 3.1정신?

무릅쓰고 조심 조심 탄천 둘레 길 한 블록 넘겨 아내와 걷기로 했다. 의외로 바람 세차다. 차갑다. 봄바람 아니랄까? 돌아오는 길, 농구공이 눈에 뜨였다.

여보! 안되요..”

옛날을 불러와 던졌다.

지나갈 때 꼬마가 던지는 걸 봤다. 그 아빠가 던지고 일려줬다. 어림없다. 꼴망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당연, 한데 놀랐다.

내가 던진 그 공은 꼬마보다 훨씬 아래였다. 다시 던져 본다. 결과는 더 허약했다. 객기? 중학 때 그렇게 어울렸던 농구였는데 숨만 크게 거칠어질 뿐이다.

힘겹게 겨우 올라선 찻길, 태극기는 여전히 세차다. 늙은이의 속내 알 까닭 있으랴, 하니 섭히 여길 일도 아니다. 헉헉거리는 숨 깊게 길게 고른다.

 

마무리

 

생산적 초 극치 현상은 인구폭발이란 위기를 겪으면서 급격하게 역전되었다. 거기엔 사회적 다양한 갈등과 개개인의 생산적 절정감이 자본과 권력에 의한 유희로 전락 되면서 그 전환에 따라 오히려 평등성과 함께 인구소멸이란 이상한 현실로 이어졌다. 호화로운 유희성이 유도한 왜곡된 법()의 증식으로 인간의 창의성은 괴멸 그 위력은 상실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행동하는 양심이 다양한 미끼에 걸려 쇠락함으로써 기본적 도덕적 뚝심은 살아진 것이다. 다만 , 그 울에 귀속되고 만 셈이다. 덕성을 쌓을 기회는 사치로 변한 것이다,

세 사람이 볼 때 내가 늙은 꼰대? 말도 없으니 뭔가 좀 이상스럽다 싶어질 때가 있을 것. 뒤집어 내가 보는 세 사람-외손녀 부모의 영향이지만 하여간,은 삶의 의미를 지상최대 최고 경지에 바탕을 둠에 따라 그 지향성은 딴 나라 사람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그렇지 자네들은 피난살이처럼 느껴질 거고 늙은 우린 침실로 몰려 더부살이 같은 기분, 자유롭지 못한 생활, 바로 현실이 아니겠나?”

이상하게도 책을 보지 않는다는 사실, 지겹도록 공부했던 지난날의 친구들임은 맞다. 그건 과거사다. 그래서 건내준 꼭지 하나 아예 읽을 생각도 않는다.

죽으나 사나 나는 서재 컴퓨터 앞에 동상처럼 앉았다간 들락거리며 키보드의 노예가 되어 눌러대고 또 읽고. “자 테이블 오른편 프린터 앞에 쌓여있는 책들 사이 펼친 그대로에 정신 사납지만 적응. 왼쪽 어지럽게 널린 페어퍼들, A4용지엔 아래서 위로 갈겨진 메모들 그리고 돋보기, 너저분하게 널린 신문 나부레기들, 딱 쓰레기통에 당장 확 처박고 싶은 그런 분위기다.

-왜 거기 있어야 하죠? 그런 것들이 전부 다다 보니 정신 사나워서입니다.- .

거실에서 만나도 표정 바뀌지 않고 마치 로봇만이 오가는 무대같이 침실로 갔다간 다시 서재로 요컨데 제정신이 아닌 정신 사나운 모습이다. 내가 남길 이런저런 자료들 리스트를 볼라치면 혼란 어지러운 형편, 한숨뿐. 몽땅 버릴 수도 있다고 지난해 유언으로 3남매에게 정식으로 말과 글로 남겼지만 하여간 숙제다. 왜 살아야 하는건지?

핵심은 바로 여기다. 인생역전 재 창조력의 발아(發芽). 극치가 창의로 도약. 인생 공부를 통한 희열과 만인 공통적 자격에 이어 스스로 선택 결정함에 후회 없는 결심이 작동되도록 해야 하리란 점, 우주 법칙은 거기까지 준비되어있는데 불평만 내뱉을 뿐 최선의 선택은 기분 따라 다르다는 현실, 바로 그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의식을 자각하고 냉철한 선택과 결정력을 키우지 않으면 아무리 우주가 준 권리라도 산 넘어 바다속으로 영영 잃어버릴 시간, 그걸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얘기들로 선회(旋回)한 것이다. 재생(再生)?

- 비가 내린다. 3.1절이다. 태극기? -

비에 젖어 흔들리는 태극기, 어쩐 일로 딸(교수)이 사진을 찍는다. 확실한 선택과 권리를 어떤 속임수에서도 넘어가지 않겠다는 의지였을까?

어쩐 일로 찍으시나요?“

기념.. 중요한 기념이지 싶어서요..”

때에 반려견들이 짖어댄다. 젖어 흔들리는 태극기를 보고 짖고 또 짖는 것.

-그렇군, 반려견(伴侶犬), 그들은 반려보다 인간을 위해 비록 잔인하게 거세(去勢)됐지만 개의 본성만은 성실하게 지니고 있군. 사람보다 정체성 훨 분명하네..-

태극기 비에 젖어 흔들린다. 머릿속 꿈쩍 않던 무거운 상념들, 언제까지? 힘이 쎄지면 명이 짧아지리라는 것? 그게 없어질 때까지?

세 번째 중요한 핵심이었다. 그 극초 생산적 절정감의 만인(萬人) 공평성은 바로 창조로 이어질 때다. 없던 것의 생산만이 창조가 아니다. 혁신과 정확한 신념이 극치감을 창조하듯 확고하게 본질의 재 정립(定立), 우주의 작동원리가 인간에게 허락한 권리, 감각적 너울 따라 출렁거릴 뿐 신생 법()들에 대한 판단력을 명쾌하게 쾌도난마(快刀亂麻). 결정적 행동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바로 그 사진 속에 담겨진 것일까? 당연히 특정인의 경우만이 아니다. 국민 모두의 마음 기저(基底)가 그렇게 자리잡혀질 때, 바로 그때가 도래하고 연이어 대한민국의 생존권을 위한 찬가(讚歌)를 부르게 된다면 바로 따라오는 기쁨? 환희? 뭐라 부르든 그것이 우리의 간절한 소망이 아니겠는가? (2021.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