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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없는 정신치료 덧글 0 | 조회 16,681 | 2009-09-19 00:00:00
정동철  



메아리 없는 정신 치료


(1980 후반)


 



사람 관계에서 반응이 없을 때 그보다 답답한 것은 없다.


다행히도 우리들은 언제나 무엇이든 주고받는 반응을 경험하고 산다. 쓸쓸하지 않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살맛이 나는 것도 그 까닭이다. 삶의 멋을 느끼는 것도 그로 인해서다. 무엇이든 주고 거기서 돌아오는 반응이 크면 클수록 보람과 기쁨을 갖게 되는 것이 상정(常情)이며 그것은 유독 우리네의 특성인 정(情)이기도 하다. 물질보다 마음이 그러하다. 먹통 같은 남편에 첼로 같은 아내의 분통이 지붕마다 부딪치는 소리가 시끄러운 것은 그래서 잘 알려진 일이다.(주: 나는 ‘먹통과 첼로’라는 제목으로 ‘속 궁합이 좋아야 집안이 평안하다’의 제목을 바꾸어 2001년 출간했다.)


의사는 그런 점에서 늘 커다란 반응을 경험하고 산다.


언제나「선생님」이라는 호칭 속에 돈까지 받아가며 사는 직업이다.(주: 지금은 아저씨의 단계를 지나 파렴치범으로 매도되고 있다. 이대로 라면 양(洋)의사는 아예 있을 필요가 없어져야 하고 한방이 국민 건강을 전담해야 옳은 세태가 와야한다. 이상하게도 그러나 그러면 모두 감옥에 넣겠다고 하는 것이 2001년의 현실이다.) 치료가 끝난 한참 후까지도 감사의 반응은 오래오래 살아있다. 생명의 은인이라는 것이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정신과 의사는 형편이 다르다.


「선생님」의 호칭엔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반응이 없다는 것이 특색이다. 어쩌다 길에서 마주칠라치면 외면 당하는 사람이 곧 정신과 의사다. 속된 말로 유곽의 창녀를 만나기라도 하듯 피하는 대상이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경우 창녀와의 긴 밤과 정신 치료비는 같다고 한다. 당연히 이유가 없을 턱이 없다. 돈 때문이 아닌 것은 물론이다.


세 가지 까닭이 눈에 뜨인다.


첫째, 스스로 정신과 화자였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마치 창녀의 고객이라는 점을 피하자는 심사와 흡사하다.


둘째, 자신의 사생활을 너무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이다. 창녀와 몸을 섞은 것처럼 너무 적나라하게 안다. 그렇다고 죽마고우의 상대가 아니란 점이다.


셋째, 치료 효과가 의사의 영향보다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한결 마음에 드는 까닭이다. 정신과 의사는 수술을 하지 않았다. 주사를 논 것도 아니다. 정신 치료를 했다지만 말이라는 것이 수단이었으니 객관성이 없다. 자신의 의지로 나았다고 보는 것이다. 마치 창녀의 몸을 빌려 배설함으로서 욕구불만을 해소했다는 격이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는 고독하다.


무던한 인내로 듣고 또 들어보지만 반응은 당장에 객관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쓸쓸하고 외롭다. 의사 중에 정신과 의사의 자살율이 가장 높다는 것은 뜻하는 의미가 많을 것이다.


후회하지는 않는다. 탓하지도 않는다. 그것이 곧 정신과 의사의 형편이란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창녀처럼 아는 척 하지 말라는 선배의 충고를 따른다.


미국의 긴 밤은 고사하고 짧은 밤보다 더 싼 치료비로 새끼 피아노(음대 학생) 렛슨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형편이지만 조용히 감수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잦지는 않지만 많은 편지 다발 속에 섞여 들어오는 환한 모습을 몇 점의 작품처럼 만나곤 할 때가 있고, 그때 보람은 크고 그래서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켜갈 수 있다.


정신과 의사도 같이 미친다면서


그것은 모르는 사람들의 얘기다. 그들과 통할 수 있는 자부심과 긍지로 든든해지는 이유는 정신과 의사만의 기쁨일 것이다.



안녕하셔요, 선생님!


작년 4월 마지막 뵙고 이제야 인사드립니다.


그때 선생님 건강이 나빠지셔서 눈에 안대를 하시고 아주 힘들어하시던 모습이었는데 요즈음은 건강하게 잘 지내시는지 궁금합니다. 모월 모일로 결혼을 정했습니다. 누구보다 기뻐하시리라 믿습니다. … 선생님 모습, 선생님 말씀, 마음에 늘 곱게 접어두고 있습니다.


“젊음은 아름다운 거야! 그걸 몰라?” 하시던 말씀. 안타깝고 답답해 하시던 표정, 온 몸, 온 마음으로 들어주시던 것이 생각나면 그리운 마음이 생겨서 공연히 눈물이 납니다. 되돌아보며 다시 감사드립니다.



또 다른 소녀의 편지.


치료가 끝나고 이어 대학생이 된 숙녀의 글이다.



저는 비가 주룩주룩 오는 이 계절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고통을 지니고 선생님을 뵙고 갔겠군요. 모두가 저 같은 성공 케이스(?)이기를 진심으로 빕니다.


희망, 좌절, 고통의 연속이었던 지난 시절들이 이제는 추억―좋았던 것은 아니지만―으로 여겨질 만큼 상처를 잊어 가고 있습니다. 이 여름에 저는 큰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저에게 일어난 일들이 우연이 아니란 것을 알았죠.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하나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피상적으로 생각하던 하나님, 죄의식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심판자라고만 생각했던 것, 원망과 한숨의 대상이었던 하나님이 아니라 저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용서와 위로를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혹 선생님께 돌아갈 제 감사의 몫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지는 않으시겠지요? 아닙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저를 선생님과 만나게 해 주신 것과 치료 과정 중 느꼈던 놀라운 결과들을 생각하면 두 분께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특별히 건강에 유의하시며 내내 평안하시기를 빕니다.‘



편지를 기다리지는 않는다.


영영 이 같은 편지가 없어도 나는 계속 듣고 또 듣는 일을 지속할 것이다. 물론 하나, 둘 성장하여 내 곁을 떠나가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몇 점의 이 같은 편지가 날아들면 더없이 흐뭇할 것이고, 그 기쁜 마음은 감출 수가 없다.


한편 영영 내 곁을 떠나가는 자녀들의 기쁜 결혼 속에 나만의 세월을 간직할수록 여생은 홀로의 길이라는 사실이 스며드는 고독이 있다. 알다가도 모를 사람의 마음이다.


어떻게 해석을 해야 마음이 편할까. 아니 어디까지 마음을 바꾸어야 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