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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반 위에 기억, 「자유」 덧글 0 | 조회 422 | 2021-06-05 00:00:00
관리자  

선반 위에 기억, 자유

2021.06.05.

정신과의사 정동철

 

 

부지 부식 간에 나섰다. 1974년 후반 어느 때의 분위기, 종로 네거리에서 광화문 태평로 거리로, 다시 세종문화회관 앞 넓디넓은 차도 한가운데 잔디밭을 바라보며 어딘가 낯선 백화점(실제 없었고 없다)으로 들어섰다.

 

마치 다양한 2층 상가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촘촘하고 복잡한 그러나 사람의 정감이 은은하게 흐르는 곳, 여기저기 가게를 둘러본다. 때마다 젊은 점원들, 웃음으로 반기며 손에 뭔가를 들고 분주하다. 어디쯤인가 지나가는 데 한 여학생과 우연히 말을 튼다. 3 이름 성도 알 필요가 없는 소녀, 나들이 옷차림이 아니라 일상적 모습이다. 잠시 머리를 식히려 나왔다는 소녀, 함께 상가 이곳저곳을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이웃인 듯 둘러본다. 때에 거기 희한하게도 수영장이 보였다. 물은 없었다. 대학입시 공부를 한다는 소녀, 수험생은 평온한 웃음의 모습 그대로다. 그래선지 살짝 누군가를 닮은 구석이 보인다.

내가 문득 나서게 된 이유는 자유였다. 특별난 동기도 급한 이유도 없다. 다만 홀로 어떤 간섭은 물론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 나만의 공간으로 걷고 싶어서였다. 나만의 사색과 자유를 위해서 말이다. 아침 신문을 본 뒤인지 전인지 앞뒤는 헷갈린다. 그뿐이다. 기사 내용이 섬듯 다가왔다. 마치 쿠오바디스(Quo Vadis, 1951,미국, 머빈 르로이 감독, 로버트 테일러/데보라 카 주연)나 벤허(Ben Hur,1959,미국,윌리엄 와일러 감독,찰턴 헤스턴 주연)네로황제(Nero54~68,로마제5대황제)가 묻어나고 있었다, 그의 엄지손가락이나 손수건 한 장으로 좌우될, 죽거나 생사 경기가 시작되는 모습들이 아물거렸다(벤허). 패자(敗者) 살인? 사자들이 기독교 신자를 향해 몰려나오는 오싹한 모습(쿠오바디스), 그런가 하면 생사가 갈린 전차(벤허.말이 이끄는 戰車)경기의 출발이 이루어지듯 그런 연상이 스쳤다. 착한 사람은 매사 선하게 악하면 무섭게, 왜 하필 그 끔찍한 연상으로? 내가 그토록 잔인한 걸가?

“... 현 정권 수사(搜査)를 막을 3중 잠금장치 마련-친정권 검사들 요직장악(중앙Sunday 202165~6, 4) 로마를 불 질러 새 도시를 만들겠다는 그런 분위기가 감돌았다. 아닌데? 마음을 텅 비우고 이런저런 모든 현실로부터의 자유를 산책하고 싶었던 것이 전부였을 따름인데.. 상념 끝자락 뒤에 그 자유는 노인, ’늙은 나의 죽음으로 담담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이곳저곳 상점들을 둘러볼 무렵 어느새 수영장에 물이 가득 찼다. 많은 남녀노소, 장을 보던 사람들이 옷을 입은 체 그대로 물에 잠겨있다. 나도 그 여학생도, 그러나 모두의 표정은 즐거운 웃음뿐이다. 어찌저찌하다 갑자기 집으로 가려는 출구를 찾기에 이르렀다. 나오니 놀랍게도 생소한 곳이다, 때에 옛날 병원야유회 등산을 마치고 내려온 북한산이 떠올랐다. 집으로 가는 길 산을 거쳐 가려는 것이다. 머릿속에 그 길이 환했다. 찻길은 광화문 대로가 아니다. 물어물어 큰길로 나오니 앞길이 확 트인다. 여학생은 내내 옆에서 웃으며 편한 모습이다. 때에 문득 우리집 한옥 사랑방 서재 선반(실제는 아파트) 위에 올려둔 기억, 양자역학(量子力學)이 떠올랐다. 바로 그것은 자유로 가는 길의 안내서 같은 셈이었다.

생명을 가진 존재의 관찰(觀察)이 없는 한, 입자(粒子)나 광자(光子)같은 대상은 구름 속의 확률로만 존재할 뿐 그 실체는 없다는 것이다. 이론적 배경엔 1.얽힘, 2.상보성(相補性 입자와 파동 둘이 함께 있을 수 없다) 그리고 3.파동함수(波動函數-매우 복잡한 의미)의 붕괴(崩壞)가 있다는 것이다.(로보트 란자·밥 버먼 지음 박세연 옮김:어제보다 앞선 내일-바이오센트리즘. 예문아카데미.서울.2018,73~90) 우주(宇宙), 자연은 무엇에도 억매일 이유는 없을 것이다. 사람이 우선할 수는 없다. 우주의 자유가 아니겠는가? 관찰자에 의해 파동함수가 붕괴되면 비로소 관찰이 이루어지는 시점에 그 구체적 모습으로 실체를 나타내 보인다는 것이다. 너무도 어렵고 알 수 없는 이론이다. 나에겐 곧 없음과 같은 격이다. 있다 해도 입자나 광자의 확률적 구름은 자유이자 나에겐 곧 죽음이 동일시 된다. 내가 눈을 감으면 모든 것이 사라지고 없어진다는 사실과 같아서다. 곧 내가 죽으면 네로든 벤허의 전차경기든 쿠오바디스의 무시무시한 사자든 모두 없어짐을 의미하니 말이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결국 몇 가지뿐 모른다가 다다. 눈을 떠 보면 사실이 보인다는 것, 관찰이다.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그 결과는 죽음과 같은 것, 봐도 실체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파동함수의 붕괴 같은 건 아예 상상할 수도 없다. 눈을 떠 정확하게 현실의 실상 그대로 정확하게 보는 것 그것이 곧 관찰이라는 것뿐이다. 결국, 양자역학 운운하는 것은 그 의미를 알기 어렵고 따라서 자유니 뭐니 하는 것은 헛소리가 아닐까? 나 말고 살아있는 다른 사람들, 그 경우의 수는 나는 모른다. 다만 살았으나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겐 자유란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이미 자유로우니까. 죽음의 결과와 같을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아는척 헛소리일지도 모른다. 의외로 그런 사람들은 많다. 잘못 짚었다고? 상관없는 일이다. 다만 나에겐 죽음은 곧 자유로 이어지는 게 전부란 사실, 그나마 양자역학이 그 단초를 보여줬다고 여긴다. 오로지 그뿐이다. 더욱 더 공부를 해야겠다는 사실만 부각 될 뿐이다.

 

선반 위에 그 기억, 거기 그 여학생은 전연 모르는 그러나 딸과 같은 정감이 흘렀으나 그것으로 더 이상 구름 속의 실체들, 나에겐 관찰되지 않는 것들, 바로 살았으되 숨 쉬며 산 것이 아닌 것이었다. 오늘 아침에 꾼 꿈이라 했다. 그 해석을 나의 전문성으로 풀고 싶진 않다. 양자역학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처지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전체적으로 꿈이란 것이 분명하나 확률의 구름 상태에 있기에 그렇고, 그 속 현실적 핵심내용은 파동함수가 붕괴됨으로서 구체적 모습을 보였다 하나 역시 이해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기에 그렇다. 결국, 거듭 자유, 오로지 가상의 자유를 양자역학과 동일시 함으로써 족할 일임을 알기에 이르렀을 뿐이다. 그 속엔 깊은 의미가 물론 있다. 자유, 거듭 확인 선반 위의 기억 자유는 바로 양자역학인 것이다. 그 뒤에 숨은 뜻을 아는 것이 급하다는 생각이 따라서 전부다. 실제 일어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정확하게 보며 알 수 있기 위해서 말이다. 내가 보고 듣는 것이 실체의 본질적 현상의 사실성과는 거리가 크다는 이유 때문이다. 나에게 보고 들을 수 있는 능력의 한계가 분명하기에 그를 극복하기 위함에서다. (2021.06.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