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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투리는 잡지도 잡히지도 말라 덧글 0 | 조회 16,547 | 2009-09-19 00:00:00
정동철  



꼬투리는 잡지도 잡히지도 말라


(1980년대 후반)


 



유월이 되기가 무섭게 거의 동시에 일거리가 몰아 닥치고 있다.


“선생님, 저는 죽고 싶어요. 집-학교-공부, 집-학교-공부, 집-학교-공부밖에 모르며 살아요. 저는 말짱 헛것이었으니까요. 왜! 왜 이래야 되지요? 친구가 말하더군요.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요. 되물었지요. 대답이 웃겼어요. 여자 친구, 그리고 술과 담배, 그런 것이 재미라는 것입니다. 왜지요? 이러면 안 되는데 왜 그래야 합니까. 그런데 정작 모를 일은 그들의 성적이 나보다 좋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진실인가요. 선생님, 전 포기했어요. 학교는 이제 질색입니다. 어차피 전인(全人)교육은 표어죠. 점수 올리기 위해 가는 학교에서 제 아무리 집-학교-공부를 되풀이 해봤자 소용이 없다면 학교를 갈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선생님, 그렇지 않아요?”


날씨와 함께 지쳐버린 수험생들이 어머니를 따라 억지로 들어서서 일단 말문이 터졌다 하면 거침없이 비슷한 얘기다. 학생들과 씨름하느라 하구 한날 라면으로 점심을 때우고 쉴 틈도 없이 세 칸 남짓 침침한 면담실 에서 갇힌 곰이 되어버린 터에 쏟아지는 강연을 감당하기란 그러니 정말 벅찬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정말 문제는 나같이 피곤한 사람이 아니라 수십만 수험생과 그들의 어머니라는데 있다. 그것은 추측이 아니다. 현실로 눈앞에 전개되고 있었기에 피곤이라는 단어 이상의 어두운 그림자가 꽃다운 이팔청춘의 마음을 뒤덮고 있는 현장에서 열변으로 바뀌지만 과연 그 결과가 무엇인지 거기에서 또 다른 아픔을 체험해야 하는 것이다.


「수험생의 슬럼프 극복 방안」에 관해 서울 YMCA에서 강연을 했을 때의 일이다.(주: 1987년 여름 수험생을 둔 부모에 대한 강연이 여기저기서 수없이 쇄도했다. 서울 YMCA는 내가 봉사하고 있던 곳이었으며 그래서 다양한 교양 강좌를 맡곤 했었다.)


프로그램을 담당한 실장과 그 전날 확인 전화를 하는 가운데 난리가 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좌석 예약을 받아 준비를 하고 있던 실장은 비상 대책을 세우면서도 거절하는데 애를 먹고 있다는 것이다. 주문대로 수용한다면 만 명 정도는 될 형편인데 좌석은 고작 5백 석, 강당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친교실에 스피커를 연결하고도 그것은 새 발의 땀 정도라는 것이다. 이미 기독교 방송국에서 녹음 강연이 며칠 자로 방송될 예정이라 밝혔지만 거절하는데 진땀을 내야하는 이들 봉사자와 그리고 기를 쓰고 들어야 되겠다는 학부모. 녹음 테이프를 만들어 배포하는 방안까지 제시가 됐던 이 아우성의 핵심이 도대체 어디에서 출발했느냐는 것이 곧 관심이자 우리 사회의 답답한 현실이다.


그 날밤 나는 잠을 설쳐야 했다. 그 날 따라「컬러로 본 1950년」이 방영되었다.


어쩌면 그 속에 나의 어린 모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미묘한 옛 생각과 37년이 지난 오늘의 수험생을 마음속에 번갈아 그려가며 이미 준비된 자료를 다시 다듬어야 했었던 강연. 과연 현장은 TV 조명과 카메라 플래시와 그리고 그 많은 청중으로 해서 난장판이었다.


<정동철>의 강연이 기발해서 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주중 행사처럼 되어 있는 이곳 저곳의 강연이 줄을 잇고 있는 것이 사실이긴 해도 그것은 착각이다. 수험생을 둔 안타까운 부모가 많다는 것이 이유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슬럼프에 빠져 헤매는 학생이 널려있다는 뜻이다. 아니 더 명확히 말 하다면 자녀와의 껄끄러운 관계를 모면하면서 좋은 효과를 얻어낼 수 있는 묘책이 요구되는 그런 마음이 전국 곳곳에 번져 있다는 얘기다. 폭팔 직전의 이유 없는 반항아들의 수험생을 어떻게 구슬려 위기를 넘기느냐가 문제의 핵심인 셈이다.


우선 불을 끄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 절대적 요구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것은 꼬투리를 보이지 않아야 되겠다는 것이었다. 꼬투리가 잡혔다하면 주객이 전도되어 수험생은 때를 기다렸다는 듯 나자빠지기 일쑤다. 맞상대로 부모에 도전해 오는가하면 보란 듯 가출을 하거나, 심지어는 골탕을 먹어보라고 자살까지도 불사하는 것이다. 이미 상전(上典)이 되어버린 수험생에게 꼬투리가 잡히지 않는 요령은 간섭과 강압이나 비굴한 회유책이 아니라는 점이다. 때는 늦은 것 같지만 수험생 자신을 위한 자신의 공부를 할 수 있는 환경 조성과 그런 요구를 뒷받침하는 것이 상책일 뿐, 전면에 나서 마치 부모가 공부를 대행(代行)하듯 수선을 떤다면 어디선가 반드시 꼬투리를 잡히고 만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10대 말년의 청소년, 소녀의 심리적 특성은 새로운 자아 개념을 확정지으려는 정체감과 독립심, 그리고 이상주의와 충동성이 교차하면서 또래의 친구나 이성과의 교제를 넓히려는 때다.


자신의 배를 자기가 직접 저어가고 싶어한다. 극성스런 부모가 자녀의 배에 올라타 노를 자기들 마음대로 젓는데 울화통이 터지지 않을 수험생이 몇이나 될까. 이미 4당 5락(주: 4시간 자면 붙고, 5시간 자면 떨어진다)이라고 몇 년째 시달려 오고 있던 그들이다. 녹초가 되어 지칠 데로 지쳐버린 판국에 그것이 차라리 삶을 위한 것이라고 느낌이 와 닿을 때 그들은 기꺼이 문제를 극복해 낼뿐이다.


그러나 연중행사처럼 반복되는 이 입시 지옥에서 가족 전체가 몸살을 앓아야 하는 일은 언제까지 반복되어야 하는 것일까? 자녀 교육 문제로 얼마나 많은 부부가 불협화음을 일으키고 있는지 그것은 안중에도 없지만, 입시의 병폐는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다.


「왜! 왜? 왜……」라고 외쳐대는 학생들은 조만간 데모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아직도 많다. 원하는 대학에 극성을 부려 입학을 시켜놓고 뒤 미쳐 자식을 잃어 통탄하는 어머니가 얼마나 많은지 그것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는 것이다. 일류 대학을 나오고 장가 시집가면 그들은 거의 부모를 외면하곤 한다. 극성 부모의 자녀일수록 그 가능성은 언제나 높다.


안목이 필요하다는 것은 당연하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 부모는 이제 대학생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그런 태도가 필요할 것이다. 제도상의 문제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수요 공급의 원칙이 좁은 문으로 제한되어 있는 이상 도리가 없다. 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문제다. 대학생이 학사 경고를 받고 아니냐는 것은 부모가 할 일이 아니라는 뜻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 학비를 대폭 올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볼 필요가 없어야 한다. 분수를 알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대학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도 그것은 필요하다. 동시에 장학제도의 폭을 또한 대폭 늘리는 것이다. 돈 없어 우수한 능력이 대학에 갈 수 없다는 것은 비극이다.


입학 기준이 그렇다고 학력고사만으로 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고교 생활에서 고교생으로서의 사회적 나름대로의 활동 상황이 어떤 것으로 되어 왔는지 평가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내신 성적이 아니라 교내 외 활동, 운동, 고적 답사 실적과 같은 것을 예로 포함해서, 방학 동안의 사회 봉사 등을 평점으로 환산하여 반영하는 것이다.


말로만 자문자답하는 혼란스런 정책보다 수험생의 앞날을 위해서 우리가 이제 분명한 대답을 준비해야 할 차례가 되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