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수필
게시판 > 수상수필
마스크와 「부리 망(網)」 덧글 0 | 조회 3,048 | 2021-08-23 00:00:00
관리자  

마스크부리 망()

2021.08.23.

정신과의사 정동철

 

전 주초(週初) 손전화를 바꿨다. 화면이 깜깜해져 전연 어쩌질 못해서다. 무척 친절했던 곳이다. 원인치료를 할 요량이었지만 결국 바꾸기로 했다. 친절은 예상과 달랐고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코로나 시대라 마스크 때문이라 여기며 끝냈다. 때에 요즘 젊은이들이 쓰는 단어들 어찌나 외진지 종로 시절(1970~90년대) 원고청탁이 쏟아지던 때, 10대의 표현방식이 기성세대와 너무 달라 상담을 통해 소상히 알게 된 사례에 대한 글, 어딘가 실려있을 것이 분명한데 그걸 찾아보기로 했다. 때에 걸린 것이 어린이와 부리망이란 한참 뒤의 이 글이었다. 전연 첨삭(添削)없이 그대로 옮긴다. 15년 전의 글이다. 소가 일만 하도록 부리에 망을 한 꼴, 그 시절 왜 그런 이미지가 떴을까? 한데 요즘 언론에 재갈이란 표현이 여기저기 널린다. 노동자는 부리 망을 벗고 주장한다. 상징적 노사(勞使) 이타성(利他性)의 일체감은 공정할까? 마스크에 재갈까지, 양자(量子) 중첩(重疊)이 아니라 이중성으로 모두 의사소통이 되겠나 싶다. 글을 두 번 써먹는 꼴이 됐다. 늙은 머릿속에 엉겅퀴처럼 얽힌 잠재의식이 있어서인가? 국회를 통과할 언론에 관한 법, 국민은 법을 위해 사는 것은 아니다. 온전하고 자유롭게 살기 위해 법의 보호를 받아야 할 뿐이다. 스친 생각이다.

 

어린이와부리망

2006.09.30.

제가 들어 드릴게요?”

“.......? 괜찮은 데...”

옆에 사니까 옮겨 드려도 되요, 들어 드릴래요?”

그러겠니?”

같은 층 옆집 어린이 같은가 싶다가 긴가민가해서 머뭇거리는 사이 차곡차곡 화단 돌 위에 내려진 선물꾸러미 하나를 들으려 한다.

 

원래 아파트 정문에 짐을 내려놓은 후 지하에 차를 대고 올라오려던 참이다. 마침 세울 수 있는 데가 정문에서 10m쯤 떨어진 곳이다. 추석이라고 받아온 이런저런 선물꾸러미를 추스르지 못하는 날 보며 귀엽고 명랑한 어린 소녀가 거들겠다고 뛰어든 얘기다. 초등학교 2~3학년? 더 어린지도 모른다. 반색하며 달려오는 나의 손녀들처럼 그렇게 말하는 듯하다.(지금은 없어진 추석 언저리 풍경)

-할아~버지!... 근대 이거 뭐야? 내가 들고 갈게요. 할아버지 그냥 들어가세요!-

내가 무척 힘겨워 보였는지 어쩐지 그가 느낀 것은 알 수 없다. 도와주겠다는 것보다 마치 당연한 일처럼 옆집 아이가 아니고선 거들 수 없는 마음이라 기특하지만, 이내 손녀도 옆집 아이도 아니라 당황한 것은 내 쪽이다.

괜찮~, 고맙긴 하지만... 어디 사는데?”

바로 옆에 있어요.”

옆집이 맞구나. 귀여운 미소가 낯익은 듯, 하지만 역시 그 얼굴이 아니다.

불과 1~2분 사이의 일이다.

어린이는 나의 표정 때문인지 상자 하나를 들어 올릴 듯 망설인다.

순간 착한 어린이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을까 따르는 것이 도리라 여긴다.

그럼 들어 줄래?”

활짝 피어나는 나팔꽃처럼 소녀의 얼굴이 환하게 터진다. 나도 웃는다. 나의 것은 시늉이다. 아파트 정문 경비실 앞 의자에 이것저것 선물꾸러미를 올려놓는다.

고맙구나, 정말 고맙다. 그래 이제 됐구나. 마음 참 예쁘네!”

당연히 같이 들어갈 것이라 여겼던 그녀는 다시 돌아선다.

아니 어디로 가는 거지?”

, 요기 옆 동이에요. 108. 안녕히 들어가세요.”

그래!? 이런, 고마워서 어쩐담. 정말 고맙구나.... 고마워! 잘 가렴.”

 

차를 지하로 옮기는데 활짝 웃던 그 얼굴이 지워지지 않는다.

-세상에 이렇게 이쁜 아이가 아직도 있구나. 남남의 어린이, 옆집도 아닌데 딱 손녀 같기만 하니....-

지하에서 서둘렀다.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보답을 어떻게든 해야겠다며 마주칠 나무 사이로 부지런히 올라왔다. 돈을 생각했지만 행여 마음을 다칠지 모른다는 생각이 곧 뒤따랐다. 좌우간 예쁜 마음을 어떻게든 확실하게 고맙다고 다져주고 싶었다. 헐떡이며 올라온 이유다.

없었다.

그녀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허전했다. 천사를 놓친 것처럼 두리번거렸지만 허사였다. 밴쿠버에 있는 손녀가 꽉 찬 웃음으로 달려왔다가 사라진 그런 허전함? 귀에 소리가 맴돈다.

-할아~버지! 근대 이거 뭐야? 내가 들고 갈게요. 그냥 따라오세요!-

-못난 할아버지!-

 

받쳐 든 손과 턱으로 괸 선물꾸러미가 넘어질세라 중심을 잡으며 엘리베이터로 들어선다.

천사같이 맑은 미소가 엘리베이터 안 어딘가 그득 차 있는 것만 같다. 머뭇거리며 고맙다는 칭찬을 야무지게 못한 자신의 얼 띤 표현이 와락 몸을 적셔 온다.

-왜 이리도 못난 거지?-

집안으로 들어서자 선물꾸러미를 와르르 집어던지듯 내려놓으며 아내에게 정색을 하고 말한다.

세상에 이렇게 이쁜 마음이 아직도 있다는 것을 몰랐네.....”

마치 수없이 지나가는 예수를 보지 못한 톨스토이의 단편, 사랑이 있는 곳에 신도 있다의 주인공, 구두장이 마르틴 생각이 들었다. 허탈하다. 그 소녀를 통해 손녀(孫女)들이 다녀간 것만 같다.

칭찬마저 제대로 할 줄, 아니 하지 못할 정도로 길 드려진 늙은이가 바로 자신이라 생각되어서다.

 

그렇다.

식히는 대로 일만 했을 뿐 먹고 싶은 풀. 하고 싶은 말(소리)을 하지 못하며 살아온 소, 자칭 지식인이라면서 법과 권력의 눈치에 익숙했을 뿐, 다섯 부리를 조심하라는 중에 주둥이 부리를 망으로 가려놓은 그 소 부리망()에 갇혀 우악스런 이중섭의 소처럼 게거품 같은 욕만 내뱉던 못난 자신의 모습을 본다.

입 부리에 재갈처럼 물려있는 부리망(), 소가 쟁기를 힘겹게 끌면서 먹지도, 되 색임도, 음매 소리 질러서도 안 되는 그 소 부리망()의 멍에가 무겁게 짓눌려온 것이다.

급기야 그놈의 눈치 때문에 찬미(讚美)의 속내마져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기계 같은 바보 늙은이, 노인은 현자(賢者)라 누가 말했던가? 뉘우치듯 어림없는 자신에게 속으로 다진다. 부리망()이 없는 망아지, 그래서 맑고 밝은 어린 소녀가 되듯 냅다 집어던져 버리기로 한다. 부리망을....

 

-꼭 만나야지, 예쁜 마음을 꼭 껴안고 확실하게 말해주어야지. 마음의 선물을 안겨주며 한바탕 웃으리라!- (2006. 9. 30.)


너무 예쁘다. 초등학교 저학년 어린이들이 재잘거리며 무리 저 지나간다. 세상에, 어찌 저리 예쁜가. 누구라 가릴 것 없이 어린이 모두가 그렇다. 그러나 거기까지, 행여 할아버지 말과 몸짓으로 표출하면 어린이 추행? 꾹 참는다.

홀로 사는 90대 할머니가 간밤에 한숨도 못 잤다며 묻는다. 무섭고 두렵단다. 흥남 철수 피난민의 모습, 미스 사이공의 절규, 이제 카불에서 벌어지고 있는 삶의 잔인한 공포, 아기를 던져 살려야 하는 애절한 엄마를 보며 무섭다는 것. 아프가니스탄 사태가 바로 옆에서 너무 끔찍하게 벌어진다는 것이다.

왜 먹어야 하죠? 일하려니까? 고프니까? 살기 위해서?...

자신에게 묻는다. 뭐라 위로를 드릴까? 그저 막막하기만 하다. 혹시 무문관(無門關:송암지원.도피안사.서울.2009) 어디쯤(몇 칙())에 답이 있을까? 아니면 벽암록(碧巖錄) 몇 칙()? 아 성경(聖經.몇장 몇절)? 나라 백성을 위한 대통령 계시니 물어보면 답이? 아프가니스탄과는 다르겠지? 답답하다. 안타깝다. (2021.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