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만 알면 뭐하나?」
2022.01.20.
정신과의사 정동철
초등학교 때 배운 구구단, 늙어빠져 녹슨 뇌지만 87세 지금도 용케 잘 써먹고 있다. 셈을 할라치면 절로 나와 쓸모가 커서다. 한데 알면 뭐하나? 써먹을 데가 없어서? 나는 속과 겉을 한결같이 쭉 살아왔노라 장담할 수 없어서다.
사람이 셋이나 죽었다. 죽었다는 사실 「겉만 알면 뭐하나?」 유재석씨의 ‘놀면 뭐하니?’처럼 노느니 한 푼이라도 벌어 써야 한다는 세상인데 사람 죽고 사는 거야 하늘의 뜻이니 넘어가라고? 프로이트(정신분석의 원조)가 말했단다. ‘나의 삶이 끝나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진실‘ 그뿐? 진실의 의미가 무언지 사람마다 같지 않은데 유난하다고? 기억력은 대단, 소학교 3학년 해방 전 배운 99단은 일본어로 고스란히 살아난다. 코로나 19 사별의 슬픔 뭐라 설명하나?
오늘과 어제의 일에서 그 인과(因果)를 있는 그대로 알면 내일의 행복이 뒤따를 가능성이 커지리라는 것을 배워 알고 있다. 비록 일본어로 구구단이 뜨지만 재생되어 계산 착오가 되풀이되지 않는다. 본심이겠지? 원인과 결과 그 실상을 알면 안 되나? 터지는 말인즉 그래서 「겉만 알면 뭐하나?」로 이진 셈. 오줌이 마렵다. 알면 뭐하나 하면 그대로 싸야 한다. 갈증이 난다. 연유를 알아야 마시고 고픔을 알아야 먹을 것이며 숨이 차면 쉬어야 하는 게 삶의 본심 즉 이치다. 원인과 결과는? 더 안들 뭐하냐고? 행여 모르기로 내일의 행복이 날아가게 되지 않을까 그게 무서워서다. 글쎄다.
신문을 보면 모르는 말들투성이다. 젊었을 때는 KFC와 JFK를 구분하며 한글은 왜 그렇게 안 되는지 마땅치 않았다. 켄터기 프라이 치킨(Kentucky Fried Chicken)과 존 F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처럼 정동철은 ‘ㅈㄷㅊ‘으로 쓸 수도 없고 써봤자 알지도 못하니 말이다. 한데 요즘은 줄임말이라며 정말 알 수 없는 신조어들 천지다. 너무 많다. 연속적이다. 그뿐인가 영어를 한글로 쓴 것 또한 반반일 정도(’갓생‘=god인생-신처럼 모법이 되는 삶), 보고 있던 신문사에 전화를 걸었다. 안 보겠다고. 알지도 못하고 오히려 수준 높은 묘한 단어들로 혼란스런 세상, 「겉만 알면 뭐하나?」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기 때문이다. TV도 스스로 켜 보는 일은 없다. 아내가 식탁에서 켜면 보게 되는 형편, 대개 웃긴다면서 결국 놀자판이란 느낌뿐이다. 물론 나만의 생각이다.
스스로 ’괜찮은 놈‘이라는 뜻을 알았다. 오영수씨, 오징어말이다. 나야 그래 봤자 그런 놈은 어림도 없다. 분당 판교로의 집에서 인천 아암대로의 병원까지 가려면 일단 길은 알아야 한다. 운전은 99단처럼 안다. 요금소는 자동으로 계산되니 의문도 없다. 병원 주차장으로 내려가면 자리가 준비되어 있다. 더 알아야 할 일은 없다. 의문이란 게 없는 것이다. 운전만 하면 되는 「AI로봇」?
병실을 돈다. 사정이 확 바뀐다. 알아야 한다. 밤새 안녕을 확인, 사이사이 웃기며 그들 얼굴에 쓰여있는 속마음을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숨이 차 호흡이 거칠지만 8층에서 7층으로 내려와 똑같이 돌아본다. 6층 진찰실 자리에 털썩 앉는다. 병상일지에 기록을 하고 한숨 돌린다. 5층으로 내려간다. 승강기다. 여자 병동, 역시 깡그리 인사를 나눈다. 동태를 파악한다. 당연히 각자의 문제점을 기억하고 속내를 알아야 한다. 지난번과 뭐가 달라졌는지를 본다. 다시 올라와 앉는다. 차팅. 숨을 고르고 이번엔 같은 층 환자들을 대면 문진하듯 끝낸다. 간호스테이션에 앉는다. 산소포화도를 측정한다. 산소는 정상치에 한참 미치지 못하고 맥박은 100을 훨씬 넘긴다. “숨이 많이 차신가봐요?”
매주 일요일의 얘기다. 패암 수술 전엔 특별한 날(설날, 추석날, 8.15 기념일, 3.1절, 크리스마스 등)은 예외 없이 거르지 않았던 일상이었다. 젋은 의사들이 혹 넘길 수 있어서다. 몸에 밴 것, 입원환자는 늘 대면할 필요를 느끼기 때문이다. 자발적이다. 구체적 본심을 알기 위해. 알면 뭐하나? 아니다. DMZ 예외 지역이다.
잘 사는 나라, 새 국가 1호 비행기로 10대 강국을 과시? 걸맞게 환자의 공간을 쾌적한 병실로 바꾸란다. 환자 20%를 줄이고 세면대도 놔야 한다. 복지부 명령이다.(이미 병동마다 병실 크기의 화장실, 거기엔 여러개의 샤워장, 수세식 변기, 화장대가 있고, 병동을 들어서자마자 바로 화장대가 설치되어 있다.) 의사를 포함 100명에 이르는 직원에 대한 봉급은 시급제가 아니다. 주 40시간제가 더 줄면 환자가 줄더라도 의사와 직원 수는 그대로 여야 한다. 정부 보조금은 없다. 사람들은 의사가 되면 푸짐하게 잘 살 거라 인식한다. 의료인 증가는 필수가 된다. 공약에도 나왔다. 하지만 보수보조에 관한 건 없다. 환자의 고통과 불안은 요일과 근무시간에 맞춰 발생하는 법은 결코 없다. 의사는 있어야 한다. 거기까지다. 내가 겉만 안다는 것 말이다. 정책의 속내를 더 알면 뭐하나? 개인 의원은 홀로 기가 막혀 폐업할 지경인데..
정신과 전문분야에 대한 새로운 의료과학정보들은 꼭 알아야 한다. 연구하는 마음의 자세는 필수, 겉만 알면 뭐하냐고? 그렇다. 수술실을 연상하면 족히 알고도 남을 일, 정신과 입원 시의 흥분과 난폭한 언행이나 공격성 내지는 자해행위, 결코 상담실의 차분한 분위기로 환산하여 여유를 부릴 형편이 아니다.
진실이라는 참뜻은 정말 모두가 다를 거다. 모르겠다. 다만 ’나의 삶이 끝나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진실‘, 종교가 없는 나는 거기까지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진실과 내가 말하는 진실은 내가 미치지 못하는 세상이다. 거기엔 당연히 자유란 의미가 강하게 내포된다. 세상을 살려면 돌아가는 정황을 알아야 한단다. 온당하든 아니든 나름의 실상 모든 것은 전문 감정기관들이 알고 있다. 알려 한들 알 수도 없으니 아예 「겉만 알면 뭐하나?」 의사로서 자신의 환자가 그렇게 됐다면 그러나 사정은 달라진다. 앞에서 말했다. 법원에서 의뢰한 정신감정으로 대법원 법정 증인심문대에 제법 앉곤 했었다. 보름이든 두 달이든 진단과 원인을 알기 위해 파고든다. 인과율을 알아야 한다. 나의 환자에 대한 경우는 더욱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 도와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림없는 얘기 완벽하게? 몰라도 한참 미치지 못하긴 마찬가지다. 신경전달물질의 양자화? 양자 중첩과 확률? 뭐 양자의식이나 동시성은 기찰 뿐이다. 다만 속이 비면 배고픔을 알아야 하고, 입이 마르면 갈증을 알아 물을 마시고, 숨이 차면 깊은 숨을 쉬며 쉬어간다. 오즘이 마려우면 당연히 화장실로 가야 함을 알 뿐이다. 불안장애, 우울장애, 공포장애, 조현병, 조울병, 현란한 허구와 공격성의 인격장애.. 허다한 진단명의 진짜 이유를 깊숙이 알려고 한다. 내가 알아야 해서가 아니다. 그런 까닭들을 당사자에게 알려 본래의 자신을 자각하도록 도와주기 위해 서다. 그의 앞날을 위해 알아야만 할 이유다. 하지만 세상사는 녹록하지 않다. 바로 정부가 있는 이유일 것이다. 결국 나는 나의 전문성과 무관한 세상사는 겉만 알면 그뿐이다. 공동체의 대한민국 국민 아니냐고? 사법부와 행정부 내지는 입법부, 요컨대 국민이 직간접으로 택한 3부와 관련된 기관들이 알려줄 의무와 책임을 질거라 믿고 있어서다. 선택적 공익이나 정의, 놀거나 일하는 것, 알거나 모르거나 사적 자유라고 하지 않나. 더 알면 뭐하겠나?
빅 데이터 시대, 코딩을 배워 메타버스에 열광하는 MZ세대들, 하지만 취업난으로 편의점만 늘고 고시원은 비워간다. 한편에선 자기만의 독특한 관심사들, 창안하거나, TV에 나가 신나게 놀면서 왕창 벌어들이는 사람들, 내용인즉 먹고 마시고 웃고 노래하며 창의성을 살리는 것들이 필수다. 물론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그건 자유다. 조기 은퇴, 노후를 즐기기 위함이란 얘기다. 언론의 우려, 불평등과 계층 갈등 그리고 공정의 소용돌이는? 공부? 글쎄다.
의사? 의사는 직업을 바꿀 수 없다. 진료 노동자다. 질병은 요일이나 시간제로 발생하지 않는다였다. 조기 은퇴자처럼 시간을 마음대로 쓸 수도 없다. 요즘 더러 나오는 조기 의사 은퇴족이 있긴 하다. 사회적으로 「겉만 알면 뭐하나?」라는 것도 그럴 것이다. 끝이란 진실의 의미가 뭔지를 알았다는 얘기지만 다 같지 않은 것이 진실일 거다. 오늘의 현실, 「겉만 알면 뭐하나?」 편할 것이란 예상, 한데 왜 이리 무겁고 답답할까? 그러니 꼭 알아야 한다고? (2022.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