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은 언제 그칠까?
2022.09.28.
정신과의사 정동철
쿠바를 거쳐 플로리다로 향하는 허리케인, 바로 공황(恐慌) 그 자체다. 제11호 태풍 힌남노와 제14호 태풍 난마돌을 치르고 난 우린 한숨 돌리고 있다. 대체 왜 태풍은 쉬지 않을까? 관심은 그러나 지금 그 자체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시국이 그 태풍을 방불케 하고 있다. 어수선하고 두렵고 무섭다. 언제나 사그러들까? 나만의 심정이 아니다. 주변의 이웃들, 정도 차이일뿐 대체로 비슷하다. 게다가 고물가, 고금리, 고환율로 허덕인다. 뿐인가 고유가까지..
정치적 판단능력은 없다. 다만 주장하는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것만은 안다. 그 속에서 회오리가 돌아 괴물 열차에 탄 듯 정신이 어지러워진다. 마치 예외 없이 좌회전하는 태풍의 눈을 중심으로 그 행로가 예측되기 어렵다는 점에서 무척 닮아가고 있어서다. 기상청 예보관들이 밤을 샌다. 그 값비싼 수퍼컴을 활용, 태풍의 경로와 그 강도를 예상하지만 비웃기라도 하듯 마구 상하좌우로 바꾸기 때문이다. 왜 태풍은 시계방향 반대(좌)로 휘돌며 경로를 수시로 바꿀까? 바다의 온도가 오르고 저기압으로 수중기(물)를 빨아올려 편서풍에 올라타기 때문이라는 것은 상식이다. 예보관들의 마음을 괴롭히는 진짜 이유가 무엇일까? 아무도 모른다. 알 수 있는 것은 그 피해를 오로지 무고한 시민들이 떠안아야 한다는 것뿐이다. 불행하게도 지금의 나라의 풍향이 딱 그렇다. 거듭 무섭고 두근거린다. 이대로 언제까지 겪어야만 하는 건가? 태풍은 그 끝이라도 있지만 복구할 여지조차 아물거린다. 다수의 마음들, 정말 어찌해야 하나?
지도자들의 말과 행동이 같기만 해도, 아니 주장의 일관성만이라도 있기만 하면 우선 마음을 놓을 수가 있을 것이다. 제14호 태풍 난마돌의 행로가 그랬다. 남태평양에서 발달한 태풍의 씨가 커지더니 동쪽으로 출발하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않아 180도 휙 돌아 서쪽을 향한다. 이어 북쪽 방향으로 틀었다. 예보관들을 놀라게 한 이유다. 우리나라를 향하는 듯 두근거릴 무렵 오키나와에 이르자 다시 동쪽으로 머리를 틀었다. 조마조마 한숨을 내쉬었다. 일본을 완전히 덮치는 것을 보고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경상도 바닷가 일부는 비바람을 피할 수 없었다. 꼭 오늘의 정국을 보는 것 같다. 행방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태풍의 경로와 너무나 흡사하다. 민심(民心) 또한 그럴까?
과연 오늘같이 평온한 날씨, 서울수복 9.28은 잊은지 오래나 하늘은 파랗고 사람들은 두려움에서 벗어나 한결같이 웃으며 서로를 바라보면서 마음을 나눈다. 편하다. 처럼 시국도 그렇게는 안 될까? 태풍이 알려주었건만 마냥 모르새다. 무엇을 원하고 바라는 걸까?
바다의 수온이 오르는 현상은 국민을 의미할 수 있다. 저기압의 형성은 국민을 위한다는 지도자들의 마음과 같은 위선일까? 모른다. 미묘한 민심에 불을 지펴 온도를 올려 수증기(民心)를 치솟게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왜 행방이 일정하지 않고 좌우로 오락가락하는 것이냐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 소용돌이치는 것과 편서풍이란 지구 자체의 특성 때문이라며 스스로 자위하고 있는 것만이 전부다. 태풍의 우측은 위험하고 좌측은 한결 덜 무섭다는 것과 연관이 있을까?
그러고 보니 사람들 본연의 인성과 같은 이치가 섞인 듯하다. 누구 한 사람 똑같은 마음으로 일관되게 사는 사람은 없다. 뭐가 달라도 다른 생각과 희망이 교차하고 있다. 죽기 살기로 결혼한 사람들이 언제부터인가 투닥거린다. 같지 않다는 본색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물며 나라를 다스린다는 지도자들의 이해관계는 매우 복잡하고 다양할 뿐 일구이언(一口二言) 으로 무척 모질다. 두들겨 대며 고함을 치는 이유다. 거기서 이는 태풍은 어디로 튈지 우리들 시민은 알 수가 없다. 마치 지구의 자전(自轉)으로 진행된 전향력(轉向力, Coriolis Force;1835) 때문에 태풍 우측의 피해가 더욱 커진다는 것뿐이다. 이 난국에 자신이 어느 쪽에 속하는가에 따라 불안은 왕창 크게 들썩거릴 것이다. 국민은 이리 쏠리고 저리 몰리게 된다. 뿐인가, 점점 그 강도는 커질 것이다. 우리 의식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지 싶다. 정작 우리 자신들 스스로는 그걸 모르고 있다. 나도 마찬가지, 그게 탈이다. 고통을 떠안게 된 동력의 원인이련만..
지구상의 사람들은 정도 차이가 있을 뿐 결국 비슷할 것이다. 해서 지구가 언제 결단날지 몰라 지구 주변을 기웃거리며 돌고 있는 쌍 소행성 ‘디모포스’ 궤도를 바꾸기에 이르렀다. 1100만km를 날아 시속 2만2천km로 충돌해 그 궤도를 바꿔 버렸다는 것이다.(중앙읿보. 2022.09.28.) 별똥처럼 날아들어 지구를 왕창 무너트릴지 모른다는 NASA의 결정이었다. 과연 우주 속의 지구는 영원할까?
멀리까지 바라는 것은 아니다. 우선 지금 당장 당대에 마음 편히 살 수 있도록 지도자들의 정의감을 바랄 뿐이다. 허구와 거짓 그리고 집착과 협박 속에 언제까지 살아야 할지 그것이 걱정될 뿐이다. 나와 가족 말이다. 하지만 아무런 대응능력이 없다. 어떤 무리의 정권 교체 고함과 플래카드로 데모하는 곳은 물론 MBC 앞에 서서 고함을 함께 칠 그런 생각과는 달리 나에겐 기력이 없다. 뭘 할 수 있겠다는 생각 자체가 멎은 상태, 한심할 뿐이다. 스스로 폐암 수술 후 완치판결을 받긴 했어도 죽음이 몇 발자국이나 남았는지 이리저리 숨길을 찾을 뿐 자신을 가누기가 쉽지 않아서다. 살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나마 그것도 믿을 것이 못 된다. 하늘에서 「평화와 안정」이 떨어지길 바라고 있는 걸까? 어이없게도 숨만 고르고 있으니 기가 찰 뿐이다.
알량하나마 그토록 관심을 품고 있던 ‘양자, 뇌 그리고 유전자(DNA)’, 그중에서도 양자역학을 읽고 또 파고 들지만 양자의식을 이해하기까진 첩첩산중이다. 고작 모든 입자(粒子)들도 역시 불확정성원리(하이젠베르크;1927)나 슈뢰딩거의 고양(1935)이 사고실험(思考實驗)속에 묻혀있는 많은 이론에 감탄할 뿐 우주상 모든 것은 쿼크(원자속의 작은 입자들-소립자素粒子)의 바다속에서 결코 한 자리에 영원히 고정되 있지 않다는 결론에 공감할 뿐이다.
아인슈타인이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나는 내가 달을 보지 않을 때에도 달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
한데 란자와 버먼은 생물중심주의(Biocentrism) 입장에서 아니라고 주장한다.
-숲에서 나무가 쓸어질 때 아무도 없는 경우도 소리가 날까?-
당연하다는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달리 아니라는 것이다.(Lanza&Berman;-Biocent-
rsm.박세연 옮김, 주-예문아카이브, 2018) 관찰자가 있어 청각과 뇌를 통한 의식이 없고선 결코 소리나 달은 거기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쪼잔한 인간사의 태풍은 다를까? 슈뢰딩거가 말했듯 전자파(電子波)속엔 정신적인 무언가가 있다고 했다. 파동은 그의 고유 함수 속에 원자 안의 전자(電子)흐름이 파속(婆束 전자파 뭉치;음걱-에서 양극+으로, 즉 좌편향)을 이루며 바로 그것이 고전적 궤도를 대체하는 양자역학의 기본개념이라 했다.(Alwyn:Stawirway to the mind-마음에 이르는 계단. 안창림-백은경 옮김, 이화여자대학교.2001) 사회적 태풍이 어떤 소리를 내고 무엇을 보여주든 관찰자(국민)의 의식이 작동해야 있기도 하지만 없기도 하다는 의미다. 인간은 우주의 4%밖에 아는 것이 없다. 96%는 어떤 과학자도 모른다. 암흑물질과 암흑 에너지다. 국민의 의식 수준을 때마다 강조해왔던 이유였다. 우리들에게 의식은 있나?
지구의 태풍 자체는 어찌 됐든 우주와 함께 영원할 것이다. 변하긴 하겠지만 지금보다 더 좋은 쪽은 아닐 것이다. 지구를 위해 소행성 궤도를 바꾸려는 지혜와 노력 그리고 시도가 그래서 필요했던 것, 즉 도전뿐이다. 나의 의식? 모르겠다. 나의 현주소가 그런 형편이라 느끼는 것이 서글플 따름이다.
공정성 문제 때문이다. 공정성 파괴가 사회적 폭풍의 한 요소란 점에서 더욱 그렇다. 고교 3학년 피난시절(1953년) 수학시험시간, 5장의 답안지를 썼다. 우정이라든가 의리 같은 것들이 깔려있었던 탓이다. 그들은 100점, 다른 친구들은? 이웃에게 법대로 이러쿵저러쿵 따지면 야박하고 이약하다든가 참 까탈스럽다 할 것이다. 사회생활 간단치 않다. 요즘 젊은 세대는 의리? 하여간 공정성을 강조해야 하는데 그게 인간관계를 묘하게 비튼다. 어디까지가 공정성의 타당성인지 정말 어렵다. 생활의 요령이 필요하다는 것 그래서 고지 곶대로 살 수가 없다. 융통성을 비벼야 한다. 바로 우리들 의식에 작동되는 사회적 폭풍에 적절한 공정성의 금도는 어디까지인지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삶의 지혜, 공정성으로 인간적 유대감에 금이 가지 않도록 하는 건 정말 어렵다. 공정위원회가 시장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고 한다. 조직상의 문제라지만 쉬운 일은 결코 아닐 것이다. 역시나 나도 그렇다. 침묵은 금? 해서 대체로 말을 안 한다. 강연에선 모두가 놀랄 정도로 재빠르게 원고 없이 두세 시간에 일사천리로 나가 청강자들의 숨을 가쁘게 하지만 나는 정말 말이 없다. 바보처럼. 의도적 처세가 아니다. 결과적으로 나 자신은 나의 의식을 모르기 때문이다. 오로지 반응의 결과다. AI 기계? 정신치료에서 동정(Sympathy)은 금물, 다만 공감대(Empathy)가 절대적이란 경험 탓이다. 박사님! 세 번째 상담인데 왜 말씀이 없죠?
가족에게 뭐라고? 오직 온전한 끈기라고? (아들의 생일을 생각하면서..2022.0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