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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은 사람이다 덧글 0 | 조회 16,106 | 2009-10-03 00:00:00
정동철  



기업은 사람이다


1995


 



나는 17층에 살고 있다.


올림픽 88대로, 강북로(江北路), 영동대교, 테헤란로, 그리고 몇 개의 뚝 방 길을 포함해서 한 눈에 적어도 8개의 차도(車道)를 내려다 볼 수 있다. 얼기설기 정신없이 차들이 달린다.


꼭 30년 전 호놀루루 산기슭에 앉아 새벽을 가르고 달리는 차의 흐름이 무척이나 부러웠던 때가 떠오른다. 유령 같은 시멘트 숲 속에 내가 살아있는 오직 하나의 증거가 되어 있는 서울의 생동감이다. 일종의 감상(感想)? 그것은 그나마 기업인들의 작품이다.


그런데,


남한산성 지화문 위에서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를 내려다보면 형편은 달라진다. 성내(城內)와 성밖의 아침 하늘은 뭔가에 덮여 있으나 색깔이 같지 않다. 딴에는 고층에서 매연(煤煙)을 피해 쾌적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자위하고 있었지만 무역 센터 건물의 상층만 아침 햇살에 인수봉(人壽峰)과 더불어 반짝일 뿐 서울은 온통 죽음의 잿빛 매연 속에 잠겨있는 것이다. 한식이자, 청명과 식목일이 같은 날에 만나던 지난 달(‘93년) 아침 7시 반의 그림이다.


연초에 뉴질랜드를 방문했었다.


서울을 떠나 시드니에 도착하니 숨이 살 것 같았다. 빠삐용의 마지막 탈출 장면을 제공했다는 갭 공원에서 바라다 보이는 시드니의 오페라 하우스는 그야말로 사실적 서양화였다. 삼대(三大) 미항(美港)이 실감되었다. 뉴질랜드의 로트아르 간헐천(間歇泉)을 볼 때까지만 해도 시드니는 확실히 넉넉한 여유, 그것이었다.


반대로 뉴질랜드에서 시드니로 다시 왔을 때 사정은 달라졌다. 왠지 조이는 옷을 입은 듯 답답했다. 마치 서울에서 갑자기 동경에 내리면 옹색한 공간에 철저한 질서로 숨이 막힐 것 같은 그런 것이라고나 할까. 하여간 비좁은 느낌이었다. 게다가 올림픽 유치를 위해 나부끼는 깃발들이 더 그랬다.


그러고 보니 뉴질랜드 사람들의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


드넓은 초원과 양떼들이 천국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입국 절차가 까다롭다. 먹는 것, 특히 육류가 조금이라도 들어 있는 것이라면 철저하게 조사한다. 고기에 묻어 들어오기 쉬운 세균이 그들의 땅을 오염했을 때 가상되는 재앙이 너무나 끔찍스러운 이유다. 그들에겐 황금 알을 낳아주는 양떼가 떼죽음을 당할지 모른다는 것이다.(주: 2001년 초 영국을 휩쓴 광우병은 지구촌의 인간을 공포 속에 몰아넣었던 사실을 그들은 원천적으로 방어하는데 결코 소홀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사람보다 양의 수가 훨씬 많은 그들에겐 곧 생존의 의미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연기 없는 굴뚝을 자랑하는 것도 그렇다. 와이카투 강변에 있는 헌틀리 화력발전소에선 연기가 나지 않는다. 가축을 중심으로 한 낙농업을 그들은 부끄럽게 여기기는커녕 자랑으로 생각한다. 산업화로 인한 환경오염은 언젠가는 자신의 생명을 노리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까닭이다. 철저한 신토불이(身土不二)의 현장이다.


거창하게 철학이라는 단어는 쓰고 싶지 않다.


알만한 처지도 아니거니와 더구나 그런 경지에 근접해 보지도 못한 주제에, 실은 이 글 자체가 버겁기만 하다. 심리학은 오히려 골머리만 아프다. 오랜 임상 경험과 물러서기를 거부하는 ‘왜?’자에 노예가 된 습성으로 눈에 띈 것을 마음이 가는 데로 함께 생각해 보자는 게 전부다.


우리는 분명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


소속감이 없는 비참한 고독을 즐길 사람은 없다. 크게는 지구촌에 속해있긴 하다. 실감이 나지 않는 게 탈이다. 한국이라는 것만으로도 역시 피부에 닿는 소속감이 없다. ‘우리 집’은 피로 연결된 만큼 그래서 또 실감이 나지 않는다. 결국 낙타가 바늘구멍을 뚫고 들어가는 기업 속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 비로써 소속감을 만끽한다. 흥분과 환호의 기쁨이 넘치는 이유다. 합격의 방(傍)이 붙었을 때 대학의 풍경을 연상하면 족하다.


이상한 것은 그 기분이 오래 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눈은 멀고, 갖가지 까탈을 부려 불만과 울분을 터트리는 묘한 감정으로 빨려 들어간다.


차를 운전하다 보면 누구나 거칠어지는 자신을 느낄 때가 있다.


새치기를 당하면 상소리가 거침없이 터진다. 항상 자기는 뭔가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은 피라밑 구조에서 불가피한 현상이다. 선의의 경쟁 속에 역부족으로 일어나는 낙오 현상을 노상 새치기 때문이라고 믿는 직장인의 심리가 원인이다. 마라톤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승자는 ‘추월 자’가 되고 패자는 새치기를 당했다고 해석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목청을 높이는 사람이 있다. 도대체 닮아서 배울만한 상사나 기업주가 없으니 일 할 맛이 날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악분배(惡分配)에 의한 과잉 저축이 주인들에게만 쏠리고 있는데 톱니바퀴처럼 말없는 기계가 될 수 있겠느냐는 주장이다. 그럴 듯 하다. 아니 사실이기도 하다. 신토불이의 합의된 소속감이 없다는 것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쏘니의 창업 주 모리다 아키오, 애플 컴퓨터 창시자 스티브 죤스, 그리고 그 유명한 EDS 창업자 로스 페로 같은 세계적 인물들은 신화적 존재가 아니라 우리네 보통 사람들과 다름없는 여물통의 주인공들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거기엔 네 가지 공통점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1) 강력한 사명감.


2) 고객과 상품에 대한 절대적 관심,


3) 초고속 기술 혁신에 대한 끈질긴 욕구, 그리고


4) 왕성한 자발적 진취성이 그 여물통에 있었다는 것이다.


당당하게 떠나라. 남이 슬쩍할 때 그것이 안 된다고 울화를 삼키지 못한다면 상사나 기업주가 쫓아버릴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비겁하다. 배울 것이 없다고 판단이 섰다면 떠나야 하는 것이 옳다.


사람은 자신을 위해 산다. 기업은 사람이 움직인다. 고용주나 피고용자가 똑같은 여물통에서 먹고 자라지 않는다면 노사(勞使)불이(不二)는 어디서고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다. 함께 망할 수밖에 없다. ‘신토불이’가 환경오염과 함께 같은 운명을 걸어야 하는 이치와 일치한다. 문제는 그것이 생각처럼 간단히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산에 올라가 보면 보인다. 내가 사는 곳이 어디쯤이고, 그 곳은 무엇으로 뒤덮여있는 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구 환경 오염 방지에 국경이 없다는 것은 불행하지만 현실이다. 지난 날 러시아의 톰쓰크시의 핵 사고가 산 증거다.(주: 1986.4.25. 체르노빌 원자로 폭발 사건으로 300여명이 사망했고, 150억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


사람을 저버린 일방적 과잉 축적은 결국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 쓸어 질 것이다. 우리가 결코 뉴질랜드의 하늘을 가질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생각만은 해 봐야 할 것이다. 새로운 ‘생각의 틀(New Paradigm)이 곳곳에서 강조되고 있다. 그것은 멀리 있지 않다. 새로운 것도 아니다. 명심보감에 이미 선현(先賢)들이 적어놨다.


제 집 두레박 짧은 것은 탓하지 않고 남의 집 우물 깊은 것만 탓하는 구나


조직 속에 함께 사는 마음을 바란다면 모두가 ‘주객(主客)’을 떠나야 한다. 매연을 최소화하는 가운데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기업을 위해서다.


노사(勞使) 모두가 다가올 21세기의 생존 법칙은 인재(人財)를 얼마나 지니고 있는지에 달렸다는 사실을 얼마나 확실하게 실감하고 상기(想起)하고 있는지에 달렸다는 점이 숙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