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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의 출퇴근길 덧글 0 | 조회 106 | 2022-11-12 00:00:00
관리자  

옛날의 출퇴근길

2022.11.12.

정신과의사 정동철

 

 

옛날얘기다.

버스 안내양이 출입구 앞을 탕탕치고 양팔로 입구 양쪽 난간 봉을 잡고 매달린 손님 남녀를 불문하고 감싸 안고 있다. 벽치는 소리를 신호로 운전사는 차를 중앙으로 확 몬다. 입구의 손님들과 그 안의 손님 모두 왼쪽으로 쓰러 질 듯, 순간 안내양은 재치있게 차 문을 확 닫아버린다.

, 운전 똑바로 해!”, “우리가 개,돼지냐?” 뭐 그런 얘기는 아예 없었다. 모두가 다행이라 여겼다. 다음 정거장, 내릴 사람 없으면 통과, 그게 좋았을 뿐이다.

 

다른 장면.

잠실에서 청계로로 가는 출근길, 시발택시를 개조한 건지 2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작은 승합차 모두에 자리가 찼다. 느긋한 기분들, 때에 출발과 동시에 기사는 바구니-하와이 어떤 교회 큰 대접 같은 연보 바구니를 닮은, 하나를 뒤로 넘긴다. 알아차린 손님, 자기 차비를 얹어놓곤 옆 사람, 이어 뒤로, 그리고 또 뒤로.. 큰 돈의 경우는 거기 준비된 잔돈을 거슬러 올려놓곤 역시 뒤로, 한 바퀴 돌곤 기사 쪽으로 온다. 정확하다.

출근길이라 대개는 청계로 주변에서 내린다. 사람들은 43, 이내 나는 2가에서 내린다. 아무런 잔영(戔影)이 없다. 의원(醫院)으로 가기 바쁘니까.

요즘 사람들 뭐라 할까? 그런 신사적 상황, 채산이 맞을까? 기사, 말이 없다.

안녕히 가세요..!”, “조심해 가세요..”

요즘도 가능한 장면일까? 참 훈훈했다.

두 얘기 모두가 30년 전쯤의 것들이다.

 

그 훨씬 전 북한의 남침으로 1953~4년경 부산 피난 시절의 얘기다.

2~3때의 초량, 남포동을 향한 꼬부라진 대로 옆에 몇몇 친구들과 진을 치고 있다. 트럭이 속도를 줄일 때를 이용 똥가방(책가방)을 빈 짐칸에 휙 집어 던진다. 트럭 뒤를 따라 달리며 철봉을 시작한다. 트럭 속도에 맞춰 매달려 가다 휙 올라타는 것이다. 실수도 떨어진 적도 없다. 운전기사 아무 말이 없다. 한데 짐칸에 종종 조수가 있는 경우, 얄밉다며 교모를 잡아 차 밖 옆으로 던질 때가 있다. 눈에 잠시 불이 날 뿐 도리가 없다. 똥가방을 다시 찻길로 던져놓고 트럭 뒤에 매달려, 가는 속도에 맞춰 자연스럽게 연착륙, 착오는 없었다.

가타부타 말도 없었다. 기사나 우리 학생들이나 무슨 고상한 법을 따지는 경우는 아예 없다. 책임이란 단어 자체를 주고받은 적도 없다. 다만 재수 없네..!‘ 그뿐이였다.

 

이태원 참사, 158명이 세상을 떠났다. 끔찍하다. 당사자들은 말이 없고 아우성만 요란하다. 나도 가본 적이 있던 곳, 수술(폐암)하기 전(5년 전) 아내와 3남매 다섯 식구가 뭔가 기념한다고 하이야트 호텔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들렸었다. 사람들 워낙 많고 흥청거리는 곳. 한데 지금 그런 불상사를 예방할 수 없었던 책임을 놓고 난리가 진행 중이다. 고교 시절 기본적으로 달리는 트럭을 타라고 탔던 것이 아닌 나 같은 사람들 책임이 무엇이였을까? , 그때 교통순경 뭘 했냐고? 글세다. 아무도 그런 얘기를 거들어주지 않았을 것 같다. 모르겠다. 하나 지금은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고장을 위한 책임감이 작동하고 있어야 했을 시대, 당연히 길은 걷고 뛰는 공공도로니까.. 트럭을 타고 내리는 것과 비교할 일은 전연 아니다.

 

때문인가? 중고등학생까지 참석한 촛불 데모-이용당하는 듯 그래야 하는지 싶다, 야당 국회의원들은 국정조사를 한다면서 국민의 서명을 받겠다고 조용하지가 않다. 세상이 달라져 책임이란 것은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긴 하다. 고상하게 말해 사법적 책임, 정치적 책임, 도덕적 책임 뭐 그런 것들 말이다.

 

한데 이즘의 10, 달라도 너무 달라지고 있다. OTT를 통한 무슨 도전(挑戰챌린지)이란 10~30초자리 동영상에 푹 빠진 현상을 우습게 볼 일이 아니라 생각되어서다. 그들의 미래는 정말 예상하기 힘들다. 가령 불랙 아웃 챌린지-숨을 참으며 몸을 흔들어 기절하는 것을 묘사하는 도전, 심지어 스컬브레이커 챌린지-일부러 사람을 넘어지게 해 뼈(두개골)를 부서지게 하는 끔직한 도전, ’기아나 현대차를 훔치는 과정을 영상으로 유포하다 사망 사건까지 일어난다는 미국의 얘기‘, 초등학교 여학생이 적라나한 성적 영상을 보면서 남자친구에게 어디까지 해 봤냐고 묻는 따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현실, 기성세대가 상상할 수 없는 짤막한 도전이란 영상들은 미국이나 구라파 청소년을 포함 확산되고 있는 중이다. 우리의 10대라고 예외가 아니다. 잘못된 빌미를 주면 그 왜곡된 결과는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로 발전한다는 점에 우리 기성세대는 유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함에도 그들을 정치적으로 또는 조폭의 잔인한 짧은 영상으로 돈벌이에 이용된다면 그 불행은 너무 끔찍한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가볍게 볼 일이 아니란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참고:중앙Sunday;’22.11.12)

ELIZA Effect(Weizenbaum,1966)라는 정신과 상담사 AI에 의한 얘기가 있다.-때가 되면 별도로 성명할 예정이다. AI 로봇에 유아(幼兒)가 무의식적 의인화하는 혼란으로 장차 성장하여 인간성에 문제가 된다는 의미를 갖는다.

 

며칠 전 난데없이 주거지에 실제 살고 있는지 확인이 필요하다고 통장이 다녀갔다. 없던 일이다. 매해 한다고? 주거의 자유가 보장된 대한민국에서 왜냐고 하니 주민센터의 주문이란다. 거의가 다 서명한 사람들을 보자 확인하지 않고 나도 그냥 서명, 믿기로 한 것이다. 엉뚱하게 이용될 일은 없으려니 해서다.

 

생각이 이어진다. 옛날 인심은 늘 보이는 그대로였던가? 살기는 팍팍해도 의심과 거짓이 적었기에 그랬지 싶다. 앞에서 거론한 이즘의 10대들 사고방식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우리 사회의 미래는 그들의 세계이기에, 그들 부모나 기성세대는 현저하게 다른 모양으로 진행되는 결과를 간과할 일이 아니란 것이다. 옳다 그르다는 개념이 아니다. 미래를 향한 이질성에서의 의미다. 따라서 당연히 늙은 내 생각일 뿐이란 점을 강조하지만 그 심경을 옛날의 퇴근길에 비추어 다져보려는 것은 능력의 한계를 인정해야 하기에 자신을 애처롭게 바라보지 않을 수 없음을 자인해서다. 대응책을 포기하려는 것은 물론 아니다. 가령 시간의 흐름은 사건의 모두를 한꺼번에 일어나게 할 수 없음을 염두(念頭)함과 같은 뜻이다. 간단한 뜻이 아니다. 뿐만이 아니다. 이라이자효과(ELIZA effect-무의식적 의인화가 AI 로봇에 형성되어 장차 인간성에 문제를 야기한다는 것)를 제외할 수 없어서다. 10대의 숏폼 콘텐트(Shortform Content)의 그 도전이란 위험성을 감지해야 한다는 뜻이다. 정치인들이 과연 자신들의 문제해결 방식 우선순위에 고려대상이 될 개념으로 여길지 아닌지는 분명치 않아 의문으로 남게 된다. 그럴 가능성이 적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강하게 끼어드니 무슨 까닭일까? (2022.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