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수필
게시판 > 수상수필
지친 남편, 아내의 내조 덧글 0 | 조회 15,552 | 2009-10-03 00:00:00
정동철  



지친 남편, 아내의 내조


1995


 



젊음의 희망들이 무지개 뒤로 밉살스럽게 숨바꼭질하는 지금, 나이를 묻는 자신은 바보가 되기에 족하다. 충만함을 누구와 더불어 어디로 향해가야 하는 것인지 씹고 되씹어 아무리 반추한들 황량한 옛날의 목소리는 귓가에 맴돌 뿐 아물거리기만 한다.


꽃은 피는 데 바람은 차갑다. 흘러간 냇물은 영영 돌아 올 낌새가 없다. 약봉지를 싸며 설마 반복하여 간구 하지만 또박또박 철부지 말대꾸하듯 완연한 응답은 찬바람에 뻥 뚫린 살림뿐이다. 때에 지친 남편, 그의 마음까지 헤아려야 하는 자신이 가없이 초라하기만 하다.


한 때를 생각해 본다.


미스 ‘김’, 미스 ‘박’, 미스 ‘장’, 그리고 미스 ‘리’로 둘러싸여 화려했던 시절이 맴돌건만 난데없이 남편의 외로움을 어루만져 주어야 할 아내가 됐다는 그 자체가 허탈하다. 쓸쓸하다. 천근같다. 인생무상이라 더니 마음의 빈자리가 너무 크다.


누구도, 무엇으로 채울 수 없는 그 자리. 여자는 운명인가? 약사이기에 그런가? 여의사라고 다를까? 영양사든 여판사든 모두가 부질없는 상념뿐이다. 남편의 어깨가 땅으로 지쳐 내려앉고 외롭게 먼 산을 바라보는 그 마음을 어루만질 만큼 과연 자신의 정신이 강건하고 여유롭다 할지가 문제다. 이유야 어찌됐던 맥을 놓고 있는 모습은 그저 청승스럽기만 하다.(주: 추미애씨는 다를 것이다. 술잔을 비우고 기자들 앞에서 지식인을 포함 언론 세무 조사를 놓고 쌍소리를 마구 쏟아놓고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는 뚝심을 갖고 있는 정도라면 해당될 여지가 없다. 스스로 지식인이 아니라는 얘기인지 그것은 논외로 치고 변호사에다 국회의원인 그녀가 국민을 너무 무시한다며 오만 방자 하다하지만 여기서 가부를 논할 형편은 아니다. 다만 그 정도의 여걸이면 문제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할 뿐이다. 2001. 7.)



나, 당신 위해


지평선을 한라산 백록담에 담아놓고


감출 것 어디 있으리


무너질세라 다부지던 눈빛이었건만



세월, 아득히


비바람 촉촉한 미소가


백록담 지평선에 스며드니


영원한 사랑이여...



바다와 산에 죽음을 맡기고


지워지지 않을


마음이라


다지던 나의 영혼, 사랑이여!



바다와 하늘이 맛 닿는 곳까지


그침이 없으리라.......



자신의 과거 속에 숨쉬던 남편의 흔적이건만 좀처럼 그 부스러기 한 조각을 어디서도 찾아 낼 수가 없다. 묵묵부답, 신문과 TV에 묻혀 쓰려졌다하면 아침으로 이어지는 무심한 시간의 흐름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 측은하다가도 치미는 울화로 번번이 분을 삭히지 못한다. 피곤하여 지치기로 치자면 맞벌이 아내라는 직업이 남편의 그것과 조금도 나을 것이 없는 까닭이다.



그러나 세상 만사가 다 그렇듯 내키는 데로 살수가 없으니 안타깝다. 뾰족한 수가 달리 있을 턱이 없으니 암울한 세계를 안고 그냥 주저앉아야 될 것인가?


틀을 과감히 벗어나 개혁을 하지 않고서는 달리 길이 없다는 것이 여권을 부르짖는 주장이다. 연탄 찌개에 손이 튼 사람들일까?


우리는 성장하면서 의존 관계를 거쳐 독립적으로 자신을 다스리기 시작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으로 성숙도가 끝난 것으로 여기는 것 같다. 그것이 아니다. 그것은 착각이다.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돈다고 했다. 기존의 지구 중심의 ‘틀’을 깨버렸다. 자신은 불행했지만 그로부터 지구상의 사고방식은 완전히 바뀌었다. 뉴턴, 아인슈타인은 물론 예술 분야에서도 기존의 ‘틀’을 벗어 던지므로 새로운 천지(天地)가 나타나곤 했다. 피카소가 그렇고, 최근의 포스트 모더니즘이 또한 그렇다.


부부 사이에도 기왕의 ‘틀’을 다시 새롭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상호 의존(Interdependency)의 관계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의존의 틀은 인간관계의 주체가 늘 ‘당신’, 즉 ‘너’가 되는 것이다. 당신이 잘 되야 모든 것이 잘 풀릴 것이라는 사고방식이다.


독립의 틀은 내가 중심이 된다. 내가 할 수 있고, 내가 책임을 질 것이라는 생각이다. 자가당착(自家撞着)의 함정은 있다.


상호 의존의 틀은 ‘우리’가 주체가 된다. 서로 의논해서 함께 참여(參與)하고 역할(役割) 분담(分擔)을 통해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서로가 공유(共有)하면서 상대에게 전가(轉嫁)하지 않는 것이다.


사고방식의 일대 전환이 있을 때, 비로써 지친 남편을 위해 아내가 어떤 역할(내조)을 하게 될 것인지가 결정된다.


틀은 과학자나, 예술가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부 사이에 또한 해야 할 숙제다. 특정 직업인이기에 경제력을 바탕으로 가사(家事) 운영권에서 독립적 위치를 확보하고 있는 듯 보이나, 많은 주부들은 남편에 심리적으로 무척 의존되어 있는 경향이 있다. 도리 없이 남편을 탓하고 간섭하여 면박을 주곤 한다. 큰 소리가 멎을 날이 없을 것이다. 결코 독립된 결과가 아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독립적이라는 단어에 연연할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상호 의존과 협조라는 새로운 틀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같은 기본적인 태도가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조라는 것은 죽은 말에 불과하며 왕왕 역겹게 여겨지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내조라는 말이 풍기는 것은 전근대적 가부장을 위한 뜻으로 여겨진다. 거부감을 갖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무턱대고 배척만 할 것도 아니다. 남편만을 중심으로 한 내조가 아니라 부부 상호간의 가족을 위한 내조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솝의 우화에서 많은 사람들은 황금 알을 낳는 거위에 관해 알고있다. 처음엔 황금 알을 손에 쥐고 거위를 애지중지 키우지만 욕심 많은 인간은 일시에 거부(巨富)가 되고 싶어 거위 속에 들어있는 황금 알을 한꺼번에 갖으려고 거위를 죽인다. 황금 알은 영원히 다시 만질 수 없다. 생산과 생산성의 역량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곧 내조라는 의미임을 암시하는 우화이기도 하다.


남편이 황금 알을 낳는 존재인가 의심스러운 경우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황금 알을 낳고 있을지 모른다. 오히려 남편의 외조를 받아야 할 사람은 자신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돈벌이로만 따지면 그럴 수도 있다.


과부가 되느니 그래도 영감이 있는 것이 한결 낫다고 한다. 남편의 경제, 사회적 능력 여하를 떠나 남편이 있음으로서 자녀를 포함한 가정의 균형이 유지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더구나 지금 외로움에 지친 남편이 사방에 널려 있음을 본다. 무능력한 남편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깊은 고뇌 속에 말못할 고독을 씹어야 하는 남편들을 생각하자는 것이다.


처자(妻子)를 위해 울분을 참고 억지웃음으로 살기 몇 해였을까. 가장으로서 체통과 의무를 다 하기 위해 ‘사회의 관행’과 양심이라는 틈바구니에 끼어 갖가지 갈등을 삭히며 껄껄거리는 가운데 겨우 살만해지면 또 여기저기서 눈총이 심상치 않다. 때에 성화같은 아내의 욕심이 덮친다. 더는 황금 알을 낳지 못하게 되어 직장이나 가정에서 밀려나고 만다. 남편들은 마음 부칠 곳을 잃어버린다. 쓸쓸하고 외롭다.


설사 아직도 황금 알을 낳는 남편이라고 해도 아내의 관심은 그 알일 뿐, 알을 낳는 땀과 인내(상황)에 대해선 아무런 관심도 없다. 그것은 당연한 남편의 도리이며 기본이라 보는 이유일 것이다.


별안간 수선스럽게 남편을 위해 보약이나, 봄 단장을 한다고 야단스레 이것저것 옷가지나 사 입힌다고 내조가 될 리는 없다. 엘리트 아내가 그쯤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겉치레에 치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게 세상이라며 강조하는 것이다.


남편의 마음을 깊이 읽어보는 인내와 포근한 가슴을 준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뻔질나게 말을 하지만 자신의 손발과 입은 언제나 따로다.



훨훨 나는 꾀꼬리


쌍쌍이 서로 즐거운데,


외로울 사 이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가리.



고구려 유리왕의 황조가(黃鳥歌)다.


무슨 심정인지 헤아린다면 내조는 일품이 될 것이다. 상생(相生)의 극치를 이를 것이니까.


(주: 아내는 남편의 황금 알을 위해 청부살인을 한다. 여성의 살인범을 상대로 연구를 하니 표적의 45%가 남편이었다고 한다. 남편은 아내의 황금 알을 위해 역시 기회를 노리고 있다. 과연 마음이 편할 수 있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인가? 2001.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