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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하나밖에 없는「나」 덧글 0 | 조회 15,499 | 2010-03-28 00:00:00
정동철  



「정신병동의 노래」-13-




세상 하나밖에 없는「나」


정 동 철


2010년 3월 15일






법정스님이 지난주 세상을 떠났죠?


그분이나 그분의 수필 ⌜무소유⌟에 대해 대개는 알고 있을 것입니다. 너무 많은 것을 가져 하나씩 버려야겠다는 것이 골자였죠. 여러분이나 나나 그렇게 버리며 살기엔 우리 모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말씀에 ‘....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에베소서 4:29) 또한 모르지 않지만 상대를 기쁘게 해야 하리라는 이치는 알지만 쉽지 않은  것처럼 버리는 것 정말 어려울 것입니다. 모두 그러나 마음에 와 닿는 얘기들이라는 것은 틀림없겠죠? 


지난주 여기서 들은 나의 얘기 기억나시나요? 네, 맞아요. ⌜문제의식⌟이었죠. 문제의식을 알려면 문제점을 가늠할 수 있는 나를 알아야 하는데 나는 누구일까요? 나의 정체, 오늘은 일상에서 좋은 본을 일러주신 법정스님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선불교의 한 선사얘기를 통해 「나의 정체」에 관해 생각하려 합니다.


불교를 믿는 분들 계시죠? 이미 밝힌바 있지만 나는 어떤 종교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불교 얘기로 듣지 말고 옛날 얘기라 여기고 들어보세요. 중국의 얘기입니다.


마(馬)씨라는 성씨를 가진 중이 있었습니다. 10대에 출가하였답니다. 이 말 마(馬)자 마(馬)씨는 오만가지 궂은일을 다하면서 뭔가를 알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인생은 뭔가,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는가, 왜 살아야하며 대체 부처란 무엇인가.... 그러나 나이 40이 되도록 여기저기 옮겨 다녔으나 알 길이 없어 결국 당시 고명하다는 한 주지스님을 찾았습니다. 


면벽(面壁)좌선(坐禪) 벽을 바라보며 ‘나는 누구일까, 뭘까’ 스승의 가르침을 기대하며 날을 보냈습니다. 해가 바뀌고 날은 가는데 스승은 그러나 한마디 일러주는 것이 없었습니다. 3년이 지나던 어느 날입니다. 주지스님이 난대 없이 기왓장하나를 들고 법당에 들어왔습니다. 벽을 바라보며 좌선을 하고 있는 마(馬)씨 옆에 돌 하나로 기왓장을 긁기 시작했습니다. 상상해보세요. 어떤 소리가 날까요? 시끈시끈 몸이 오싹거리는 묘한 소리, 아주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긁어댑니다. 스승이 하는 일이라 감히 뭐라 말할 수는 없었죠. 근대 기왓장 긁기를 하루가 가도 그만 이틀이 가도 그만 열흘이 다가왔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한마디 가르침이 없던 터라 불만이 쌓인 심사는 볼멘소리로 터졌습니다.


“스승님, 대체 왜 기왓장을 긁고 계십니까?”


“아니 자네 몰랐나? 이걸 긁으면 여기서 금이 나온다네 금! 하하...”


웃으며 연신 긁었습니다. 어이가 없었죠. 화가 치밀 지경입니다.


“아니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 거기서 백년을 긁고 계신들 금이 나오겠습니까? 제발 그만두시죠!”


비로소 멈추며 하는 말씀,


“그런가? 듣고 보니 자네 말이 맞겠군. 제기랄, 괜한 짓을 했구먼...”




나는 환자들 책상사이 줄을 따라 밖으로 나갈 듯 그 주지스님의 거동과 흡사한 흉내를 내며 걸으면서 몸짓을 섞은 얘기를 계속했다.




“그런대 말이야, 거기 10년을 앉아있다고 말이 소가 될까?!”


하고는 나간 것입니다. 




그 대목에서 약간 묘한 악센트를 올리며 전후좌우 환자들을 향해 물었다.




- 무슨 뜻? 뭔 얘기일까요? -


말 마(馬)자 마(馬)씨가 도를 트겠다고 좌선에 몰두하는 것은 좋지만 원래 타고난 성품이 말인데 소처럼 앉아있다고 과연 소가 되겠냐 그런 말이겠죠?  




환자 한 사람이 대답한다.


“안되죠. 말이 소가 될 수는 없죠.”




- 맞네요. 여러분이, 여기 그저 약이나 먹고 이제나 저제나 나갈 때만 보채며 기다린다고 과연 달라질게 있을까요? -


쉬운 얘기 같지만 실은 어려운 얘기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각기 얼굴이 다르듯 모두 품성은 같지 않을 것입니다. 대체 자신의 원래 성품은 뭘까요? 말일까요? 소일까요? 어쩌다 여기에 있게 됐을까요? 쉬운 얘기가 아닙니다. 


한 가지 얘기를 더 겻들이렵니다. 




오후 1시 식후지만 책상에 업들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옛날 백 살 먹은 노인이 세 아들과 함께 살았답니다. 나보다 수물 다섯이 더 많은 할아버지, 그들은 요즘 얘기로 달동네 후미진 쓰레기 덤불 옆 한 칸 방에 살고 있었죠. 끼니가 없을 만큼 찢어지게 가난했습니다. 저녁은 뭐냐고 아들들에게 묻습니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한심했습니다. 멀쩡한 자식들이 축 늘어져있는 것이 더욱 보기 싫었습니다. 앞에 모이라며 일렀습니다.


“내일 시장에서 날 팔아라. 매물(賣物)이란 팻말을 목에 걸어 시장에 내놓으면 사갈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돈으로 너희들 장사밑천을 해서 살도록 하거라!”


나이든 아버지가 끼니가 없다하니 미쳤는가 싶었다. 백 살이나 된 할아버지를 누가 사갈 것이며 또 아들로서 애비를 어찌 팔란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급매물 정동철⌟ 말하자면 이런 식이죠, 사실 그런 제목으로 글을 쓴 적도 있었지만 하여간 쓸 만하니 팔라는 것이었습니다. 나, 정동철을 얼마에 사갈지 그걸 알 수 없듯 참 웃기는 얘기겠죠?  


다음날 날이 밝자 아버지 성화대로 시장에 내놨습니다. 마침 기이하게 여긴 한 상인, 중간도매 상인이 천 냥을 주고 사갔습니다. 현자(賢者)라는 설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상인은 노인을 사랑방에 앉혀놓고 바로 시험을 하기로 했습니다. 마침 꿀을 몽땅 사서 되팔 작정이었기에 꿀단지를 내놓으며 감정을 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맛도 좋고 색깔도 좋긴 하지만... 죽음의 향이 나는군요.”


“아니 한번 찍어 보고 어찌 그렇게 말할 수 있나요?"


상인은 꿀단지를 판 집으로 가서 이 꿀은 어디서 벌을 키운 것인지 알아봤습니다. 


“공동묘지 옆 벌집에서 나온 꿀입죠.”


사랑방으로 뛰어온 상인은 할아버지를 끼어 앉고는 감탄했습니다. 하마터면 그 꿀을 모두 샀다가 낭패를 당할 것을 면해서죠.


“오! 나의 보물 현자여!”하며 부드러운 빵과 양고기를 내왔습니다.


노인은 말했습니다.


“나는 나리의 보물은 아니올시다. 그저 필요할 때 쓰시면 되니 조용히 있게 해 주십시오.”


열흘이 흘렀습니다. 상인이 찾아와 장지문을 열고는 무엇이 보이냐고 물었습니다.


“자연이 보이는군요.”


“또요?”


“잘 생긴 말 한 마리가 있네요. 혈통도 좋군요.”


“내가 저 말을 사려고 합니다. 괜찮겠죠?”  


“한대 저 말은 갱년기의 어미에서 나온 말입니다.”


“갱년기라니, 그건 말도 안 됩니다. 갱년기에 어떻게 새끼를 낳을 수 있나요?”


알아보니 할아버지 말이 맞았습니다. 다시 고맙다며 더 부드럽고 푸짐한 양고기를 내왔습니다.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시끌 버끌 상인이 한 여인과 함께 찾아왔습니다.


“결혼할 여인입니다. 어떻습니까?”


“미인이시군요. 그런데.............”


“그런데 란요, 왜요?”


“더는 얘기 할 수가 없군요.”


“천 냥을 들이지 않았나요? 아시는 대로 말씀하셔야죠. 뭔가를 숨기고 있죠? 그렇죠?”


“할 수 없군요. 이 여인의 어머니는 그 유명한 창녀입니다.”


놀랐습니다. 그럴 수가 없다며 펄쩍 뛰는 상인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요즘말로 여인의 가문은 군수 격인 양반인데 어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일단 들은 이상 그러나 좋은 기분일 리가 없겠죠. 알아봤습니다. 이게 웬 일인가요. 그녀의 어머니는 노인의 말처럼 창녀였습니다.


인생대사의 고비를 넘긴 상인은 감사한 나머지 또 부드럽고 따끈한 빵과 잘 구어 진 양고기를  풍성하게 대접했습니다.


얼마가 지난 후 노인의 아들 삼형제가 찾아왔습니다.


“편히 지내셨습니까? 어려움은 없으시고요? 그 상인은 잘 대해주던가요?”


“마음씨가 괜찮은 사람이지, 잘 대해주는구나. 그러나 출신은 속일 수 없는 법, 늘 빵과 양고기 이상 선물을 할줄 모르는 사람이지. 그 어미와 애비가 빵과 양고기를 굽는 신분이었으니까....”     


천량의 돈으로 장사를 해서 자리를 잡은 아들들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마침 사랑방 앞을 지나다 이 말을 듣게 된 상인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습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나를 상놈의 출신으로 여기다니. 화를 참지 못하고 어머니에게 달려갔습니다. 대신에 해당하는 양반집 출신이었기에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너무 사태가 심각한 것을 알고 말했습니다. 


“언젠가는 말하려 했었다. 나는 원래 아이를 낳지 못했다. 마침 우리 집 빵 굽는 하녀가 아이를 낳았기에 천량을 주고 샀지. 그게 바로 너란다. 하녀의 서방은 아마 양고기를 굽는 사내였을 게다. 어미를 용서해라....”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그러나 결국 상인은 노인에게로 왔습니다. 자신의 본성을 알게 되자 어이가 없어 한바탕 웃었습니다. 이어 눈물로 자신의 현실(치부이자 허점)을 있는 대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현자여! 저와 오래 오래 사시기를 바랍니다.”하며 껴안으려 했습니다.


할아버지가 대답했습니다.


“수치심을 알기에 이르렀고, 이제 나리의 그런 본성(本性) 까지 알고 웃을 수 있으니 내가 나리 옆에 더 있을 이유는 없게 되었구료. 가리다.”


여러분! 어떤 생각이 들어요?


여기까지가 오늘의 얘기입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나, 그것은 누구에게나 소중합니다.


말했었죠. 이곳 해암병원이 아니고선 들을 수 없는 얘기, 그것은 정동철이 유명해서가 아니라는 것 말입니다. 전화번호부를 보면 정동철의 동명이인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정동철」이 내가 아니라, 나 여기서 지금 얘기하고 있는 내가 정동철이고 그래서 「급매물 정동철」처럼 여기가 아니고선 들을 수 없는 얘기이듯 똑같은 이유로 여러분 또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한 사람 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참고할 것은 그러나 아내, 남편, 부모, 자식, 형제, 친구, 이웃이 없다면 아무리 소중하고 잘나도 의미는 없겠죠. 무인고도에서 나라는 것이 소중한들 먹고 사는 것이 고작이니 말입니다. 가족이나 이웃이 있기에 하나밖에 없는 나의 소중함에 뜻이 있을 겁니다.


지난주 「문제의식」에 관해 얘기를 기억하시죠. 그 문제의식을 알려면 내가 누구인가를 알아야 하고, 그 내가 비록 문제가 있다 해도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가를 또한 알아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제 나는 떠납니다. 내일 당장 떠난다는 것이 아니라, 뒤집어 말하건대 여러분이 여길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기에 있게 된 연유에 관한 문제가 무엇이었던가를 알아차릴 수 있음과 거의 때를 같이해서 이루어지겠죠. 그렇지 않을까요?


여러분! 소중한 한 분 한분! 여러분과 저기 면담실에서 면담할 때 왜라고 물으면 ‘그냥’ 또는 ‘모르겠어요.’만 되풀이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떠날 준비를 할 수 있겠나요? 합시다. 꿀은 술이나 이성(異性)처럼 유혹적이지만 그 정체를 알기 힘듭니다. 말은 요즘말로 차와 같겠죠. 무엇을 사서 어떻게 쓰느냐는 것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배우자 또한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의미할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사람관계에서 사람을 볼 줄 알고 사귀고 있었나요? 자신의 표현방식, 생각하는 방식, 문제를 풀려는 방식은 어떠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게 어떨까요? 거기에 소가 말처럼 행세를 잘못 했었는지,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솔직하게 그렇다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과욕, 과신, 그리고 견딜 수 없는 화가 바로 자신의 문제였다는 사실,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됐는지 말입니다. 비로소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헷갈리는 요즘의 날씨처럼 그럼에도 개나리가 피듯 달라지지 않을까요? 상인이 자신의 치부를 받아들이듯 그렇게 말입니다. 




연자를 위해 준비된 탁자와 물 컵은 언제나 나에겐 무용지물이다. 원고를 이용하지 않는 나는 50여명 환자들의 책상사이를 왔다갔다 톤의 높낮이와 표정을 바꿔가며 말을 맺기 위해 자리를 뜨려 한다. 드디어 남긴 마지막 말,  



“내가 떠날까요, 아니면 무작정 애원하기만 했던 자신의 원래문제가 무엇이었는지 알아차려 여러분이 떠날 채비를 할까요?”




박수 그리고 고맙다거나 사랑한다는 등 뒤통수로 듣게 되는 가운데 병동을 나온 다음날 개인 면담을 한다.


어제 얘기에 대한 이해도와 반응에 관해 그들의 문제점을 인식시키기 위한 것이다. 정확하게 의미를 파악한 표현은 사실 몇몇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좋았다며 감명을 받았다거나 아무리 돈을 줘도 들을 수 없는 얘기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는 표현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던져진 얘기 속에 그의 관심사가 무엇이었으며 그 반응이 가식적인가 또는 늘 품고 있던 고착된 생각인가를 알아내려는 것이 의도다. 일견 횡설수설 엉뚱한 모습을 보였든 환자에게서 정확한 이해도를 발견하는가 하면 청산유수 똘똘해 보이는 환자에게서 실망스런 설명을 듣는다. 결국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심리적 투영검사(投影檢査)처럼 그들 마음속에 준비된 속내들이 보다 쉽게 배어나온다는 것이 그것이다. 집중면담을 통해서 얻을 수 없는 자료들, 이른바 잠재의식에 깔려 그들의 문제점을 깊이 좌지우지하던 사연들을 알게 되고 그것은 바로 치료로 이어진다. 모두가 환호하고 좋아하는 강연, 마치 ⌜열린 음악회⌟에서 터져 나오는 환성처럼 좋아하는 것은 모두 엇비슷하지만 가사를 외우고 있어서가 아니듯 그들은 나의 강연을 노래처럼 듣고 있는 듯싶다. 거듭 강조하는 것은 그들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던 애증(愛憎)이 생활의 울타리 안과 밖을 넘나들며 이런저런 문제가 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認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치료자 내가 알게 된 그들의 속내를 그들에게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되돌려주기 쉽게 된다는 뜻이다.




앗차 알아차렸을 즈음,


“이제 퇴원할 준비를 하도록 해야겠어요.... 정리를 해 나갑시다.” 


머뭇머뭇 그렇게 보채고 내보내달라던 때와는 달리 불안하다는 어떤 환자,


“아직 준비가 안됐는데...... 될 수 있을까요? 자신이 없어요.....”


병동 안에 있는 면담실을 나서려 문고리를 잡는 그의 한손과 다른 손은 눈물을 훔치고 있다.




여기에 올린 글 끝머리와 유사한 현상들은 다른 곳에서도 발견하게 된다. 인터넷 나의 홈페이지를 긴요하게 이용하는 나에겐 다양한 사이트와 더불어 각종 댓글들에서 유사한 의미를 찾곤 한다. 노래를 통해 나타나는 호(好), 불호(不好)의 강약(强弱)장단(長短)과는 달리 개체마다 지니고 있는 특유의 다양한 문제해결방식 즉 성격, 비판의식이나 더 나아가 자아(自我)의식(意識)-매우 깊은 뜻이 있어 훗날 말하겠지만, 이라는 것을 엿볼 수 있게 되는 까닭이다. 


당연히 분석치료수단으로 나만의 또 다른 인지치료(認知治療)-기왕에 있는 방식 이외 특화된 방법을 정형화하기 위한 실험이 그래서 지속되고 있다. 이름하여 ⌜선적 정신치료(禪的 情神治療)⌟. 다행스럽게도 하나의 공식으로 정착될 공산이 커지고 있다. 어쩌면 나만의「한국형(韓國型) 성치료(性治療)」가 그러했었든 것처럼 방식을 달리한 하나의 치료방법이 정립되지 않을까, 그래서 조금은 설레고 있는 중이다. 삶의 한 보람이자 일하는 의미이기도 하지 않을까 여긴다. 


무(無), 무(無), 무(無)! 


없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사구(四句:①있다, ②없다, ③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④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를 분명 모르는 터라 다만 비유컨대 무(無) 즉 평상심(平常心)과 비슷한 응용이라는 얘기이다.  




참고: 내용 중 이야기들의 출처는 벽암록(碧巖錄), 사색(思索;이화여대철학강독회, 절판), 


      그리고 사랑과 지혜의 나무-온 세상의 아름다운 이야기들(앙리 구고) 등이다. 


      (2010.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