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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목나무 한그루 덧글 0 | 조회 17,187 | 2010-05-02 00:00:00
정동철  




枯木나무 한그루


정 동 철










오랜만이다. 


제달에 달력을 뜯어보긴 정말 오랜만이다. 언제부터인가 적어도 1주 전이면 방방이 걸려있는 달력을 찾아가 그리고 병원 곳곳의 달력도 모조리 시간을 재촉하듯 그랬었는데 집의 달력을 그달 초하루에 뜯어낸다. 묘하게도 홀가분한 세월을 느낀다.


⌜....... 어찌할 줄 몰라 선생님께 전화 드렸던 건데 사실 끊고 나선 더 기분이 안 좋아졌었어요. 선생님 목소리가 너무 안 좋아서 제가 괜히 서글퍼졌거든요. 흘러가버린 시간들, 제가 스물여덟이란 나이가 된 것처럼 선생님도 많이 늙으셨구나 싶은 게,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났어요. 영원히 제 투정을 받아주실 수 없고, 언제까지나 제가 잘 사는 모습 보길 기다려주실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들었어요. 그래서 저, 너무 슬펐어요. 철부지 어린애마냥 선생님께 칭얼대고 힘들다고 매달렸던 게 후회됐어요. 잘 해야 하는데.......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하루 세끼 밥 먹고 여덟 시간씩 자고 싶어요. 요즘 제가 바라는 건 그런 거예요. 우습게도. 선생님 건강하셔야 해요. 오래오래 사셔야 해요.⌝  


혜지, 몇 권의 소설이 될 오랜 동안의 인터넷 상담과 직접 면담을 통해 죽음을 늘 끼고 다니며 살아야하나 반문하고 또 묻던 소녀, 이젠 숙녀가 된 그의 전화를 받은 건 한참 목감기로 정말 힘든 밤 그것도 다음날이면 장거리 운전을 해야 하는(일산에서 분당으로지만, 강릉에서 서울 때도 그랬다) 잠자리를 깨운 가냘픈 목소리에 힘들다 했던 것이 울컥 눈가의 이슬로 이어진다. 어쩔 수 없이 늙어버린 세월, 아니 늙어야 하는 세월에 아직도 내려오지 못하고 오르기만 하는 자신도 그렇지만 설사 힘들기로 결국 나의 한계를 보여주었다는 것, 그녀의 실망이 오히려 힘으로 바뀌었음 더 바랄 것이 없지만-그렇게 되길 갈망하지만, 처져있을 모습이 홀가분함과는 달리 아물거린다. 


달력을 제달에 뜯으며 스쳐간 춥고 추운 백년만의 별난 봄은 ⌜꽃들의 재앙⌝으로 내년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의 수정을 도와줄 벌이 추위에 사라진 탓이다. 처럼 나는 빠져나가는 힘을 주어 담을 기력이 없음을 알아차린다. 편지가 그렇게 일러주고 있는 것이다. 


메일을 열어보기가 겁나는 것도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다. 매우 절친한 동기 동창 인숙의 남편 부고가 곧 날아 들것만 같아서다. 췌장암 수술로 참기 어려운 고통 때문에 제발 가게 해달라는 것을 설득하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는 중이라니 얼마나 힘들까 때문이다. 달이면 적어도 두 번은 라운딩하던 친구 또한 콩팥을 떼 내어 기력을 찾을 수 없다는 것도 한몫한다. 거의 주말부부처럼 만나는 아내 역시 왠지 점점 작아 보이고 있는 중이다. 


어쩌랴 어제 6층, 동별 윷놀이로 왁자지껄 흥겨운 모습과 4층 여자병실로 내려와 1등을 한 선물로 뒤풀이를 하는 얼굴과 얼굴 속에서 혜지와 같은 똑똑한 숙녀들의 밝은 표정들을 본다. 아무리 병들고 어렵다 해도 늙어 굼뜬 몸과 같지는 않다는 사실이 대비된다. 오늘은 메이데이 요란했을 서울의 거리들이 천안함 침몰로 조용하다. 그럴 것이다. 애도 감정과 분노 그리고 허구가 생사를 가른다는 마음들의 혼재함, 본시 그런 것은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 아니었음 모르고 있지 않지만 다시 살아나는 봄빛과는 역비로 까라지는 한가함의 나른함은 목을 휘감고 놓아주질 않는다. 콜록 콜록.


세 명의 상담이 오늘을 기다리고 있다. 늙은이에게 기댈 것이 있다는 것은 지식이 아닐 것이다. 베개를 강아지로 여기며 앉고 서성거리는 숙녀, 미국에서 Multimedia 중 Animation석사를 취득한 환자의 상태를 점검하려 병원에 전화를 걸자 이내 에피네프린이 쏟아진다. 기력이 번개처럼 찾아든다. 환자에 관한 한 늙음은 없음으로 돌변한다. 긴장감이 존재의 이유라는 뜻이다. 해서인지 나의 혈액은 정상치로 환원되고 있다. 높은 것은 단 하나 PSA, 21에서 9.5, 다시 5.5로 떨어지고 있다. 술을 마시지 않고 아침저녁 모닝 빵으로 대신하는 식생활과 관계가 있으리라 본다. 운동량이 없는 형편에 적절한 긴장감은 일종의 활력소일가? 집에 오면 늘어지는 이유가 까닭일 것이다. 웃으며 일하는 마음 말이다.


⌜... 제 이러한 밝은 모습을 찾게 해주신 박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어버이날이 다가와 정성스럽게 박사님을 행각하며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크신 은혜 늘 감사드리며 더욱 건강하시길.......⌝


신정이 남성용 주름제거 화장품과 함께 든 카드에 적은 글귀다.  


주부부터 큰 손까지 삼성생명 상장주식을 사려고 와글거리는 한편엔 46명의 애끓는 한이 예의 죽음을 끼고 사는 처녀와 더불어 과연 사람의 본래심(本來心)은 무언지 매우 알기가 힘들다. 말은 쓸수록 허구가 많아진다는 것 외엔.... 


“Joe가 애원한다고요. 완전히 변한 거 있죠. 제발 가게 내버려달라고.... 너무 힘들어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른 것 아마 분노가 마음을 꽉 매우고 있을지 모르죠. 옆의 사람이 힘든 법, Dr. 정! 힘냅시다. 자신도 돌봐야지....”


미국의 친구와 전화로 나눈 말이다.


-우리 늙은 모두는 예약한 상태 기운 냅시다.- 


두근거리는 마음이라 적은 나의 메일을 받자 걸려온 내용들이다.


“선생님은 고목나무 같습니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로 키어온 아들을 꼭 선생님 같은 모습으로 키우고 싶습니다.”


가룸 마가 힛긋거리는 무거운 환자 한분의 말이 맴돈다. 법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가려는 아들을 맹모삼천(孟母三遷)의 마음으로 따라가야 한다는 모진 마음을 늦추지 않음과 현실사이의 거리를 염두 하지 않고 자신의 고집스런 울타리 속에 꽁꽁 묶어둔 마음이다. 본시 역사란 깡그리 소수집단을 위한 거짓말이라는 실존처럼, 없는 제자를 향한 산상수훈에 모처럼 털털 웃음은 내 것이지만 임제선사(臨濟禪師)의 방망이를 든 사람 도처에 널려있듯 필시 그녀는 그의 심상(心像)을 투영(投影)해 본 나의 모습이 잘못된 것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의식(意識)하고 있는 나는 없으며 그녀가 본 것은 허구가 틀림없으니 ⌜고목 한그루⌝라는 실상이 있는지 진실로 의문일 뿐이다. 그야 홀로 다진 얘기라 그렇다 치고 이제 심각한 고민 하나가 과제로 남아있다.


“박사님으로부터 <마음의 지팡이> 하나를 얻어가려합니다.”


젊은 나이에 교도소는 물론 곳곳의 병원을 돌다 안동에서 조두영박사를 만나 처음으로 정신과의사의 의미를 알 듯 이내 이송된 환자는 봉사에 열중하면서 나에게 청하는 중이다.        


대체 스스로 알기 벅차 그 실체도 모르는 주제에 무엇을 어떻게 건네야할지 그저 남감하기만하다. 주어야 할 말 지체가 아예 있기나 한가부터 의문이다.


뜰 앞의 잣나무 한그루? 庭前柏子樹也...........


오월 초하루 제달의 달력을 뜯으니 비로소 분수를 때에 맞추어 살 수 있을 듯싶긴 하다. 내년엔 네 가지 꽃이 동시에 피는 변덕스런 봄 날씨로 나의 기력처럼 벌마저 도망가 수정을 제대로 맺지 못하는 올해와는 다를 수 있으리라 기대를 해본다. (2010.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