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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외적 풍경 덧글 0 | 조회 17,317 | 2010-05-06 00:00:00
정동철  




예외적 풍경


2010.5.5. 어린이날


정동철.




어린이날,


밴쿠버 손녀들에게 전화를 넣었다. 중1의 큰 손녀가 밴쿠버를 대표하여 첼로대회에 나가게 됐단다. 그래서가 아니라 어린이날이면 언제나 선물과 더불어 저녁을 함께했던 터라 할아버지가 옆에 있지 못해 대신 며느리에게 오늘저녁 근사한 외식을 하라 했다. 덥석 안아주고 싶은 손녀들 그저 좋을 뿐이기에 그렇다. 지난달 손녀들이 보낸 아내를 위한 각기 다른 카드, Grandma와 Smile!에 고양이가 보는 각도에 따라 커졌다 작아졌다 손녀들처럼 <사랑해요, 할머니 그리고 할아버지!> 하면서 웃고 있다.



고양 행신동 병원 앞 대로(大路) 네거리로 나와 좌회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앞 차의 운전자 손이 밖으로 나와 있다. 모양세가 담배다. 노안으로 분명하진 않으나 팬터마임이 그렇다. 맞았다. 한 목음 빨더니 바로 옆에 던진다. 중앙선 표지 봉들이 늘어서있고 거기 봉 주변엔 흙이 울퉁불퉁 소복이 쌓여있는 곳이다. 밉살스럽다. 뒤통수를 냅다 쥐어박았으면 딱 이련만 내릴 형편도 그럴 용기도 없다. 뭐라 한마디 소리라도 질러주었으면 시원하련만 결국 포기라는 비겁한 마음이 버벅거리는 찰나, 마침 비교적 젊은 청소아줌마 한분이 찻길을 건널 듯 예의 중앙선으로 돌아선다. 골프 모자를 쓴 마른 아줌마 그러나 허리가 꼿꼿한 것을 보니 건강해보였다. 유치원아이의 륙색을 등에 맨 것이 형광(螢光)상의와 어딘가 불균형을 이루고 있었지만 생철통을 대각선으로 잘라 만든 쓰레기통을 지지하고 있는 막대를 왼손에 잡고 오른 손의 집개로 닭 모이주어 먹듯 중앙차로에 늘어선 봉 주변을 이리저리 꽁초들을 주어 담는다. 건너편 찻길 가운데 꽁초가 보였는지 그쪽 복판으로 간다. 마침 맞은 편 신호가 열렸다. 차가 그녀를 향해 달려온다. 아예 건너가든가 중앙선으로 들어서든가 조금 조마조마한데 그녀는 이쪽으로 아슬아슬 기울더니 드디어 바로 앞차의 운전자가 버린 꽁초를 지께로 줍는다. 아직도 연기를 뿜고 있을 꽁초 것만 아는지 모르는지 한발 앞의 또 다른 꽁초를 담는다. 휴~, 한숨이 터진다. 동시에 시원함 아니 통쾌함으로 이어졌다. 보란 듯 주어 담으며 그 친구의 양심을 쿡 찔러준 듯해서다. 마치 내가 아줌마인 듯 쌍판대기를 봤음 싶었는데 그녀는 바쁘게 주어 담는 일에 열중할 뿐이다. 디카를 생각할 때 그녀는 이미 건너편으로 가버린 뒤였다. 머쓱했을까, 그 친구 말이다. 어린이날 등에 매달린 륙색과는 달리 앞 차의 운전자는 예외적 사람으로 보였다. 못된 놈.


차 속에서 기분을 내며 내뿜는 담배연기를 만끽하다 밖으로 내키는 대로 던져버려도 되는 사람, 그런가하면 내색도 없이 그걸 주어 담는 아줌마, 그리고 그런 풍경을 보는 허잡한 감시카메라 같은 나, 이건 일상은 아니지 싶다. 쪼잔한 영상은 비약하기 시작한다. 돈으로 치면 버리는 사람은 제 것이라 당당하겠지만 줍는 아줌마는 분명 우리의 세금으로 그렇게 거리를 누비며 바쁘게 움직인다는 것이 불공평하다 싶다.


짚어본다. 버리는 사람 쪽에선 낼 세금 다 내고 내키는 대로 버린 셈이다. 그가 버리지 않았으면 아줌마의 일거리는 처음부터 생기지 않았을 것이므로 생각하기에 따라선 아줌마를 위해선 고마운 사람이 된다. 일자리 창출자? 도덕적으로 사회라는 규약은 복잡해지기 마련이다. 좀 된 얘기지만 파리 시내에서 담배꽁초를 버리는 것은 미덕이다. 그래야 청소부가 먹고 살기 때문이다. 버리는 사람을 나처럼 쥐어박고 싶다는 사람은 없다. 결국 문화적 필터링을 거친 기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놈의 기준에 어떤 좌표가 진실인지 거짓인지 그게 너무 아리송하다. 예외가 아니라 일상적인 것? 그것을 보고 자판을 눌러대는 나의 뇌구조는 무엇이 달라서일까? 과연 예외는 아닐까.


한 시간 전 20대 후반의 처녀가 누워있는 보호실에서 잠시 얘기를 나누었다. 너무 좋다며 푹 자겠다고 했다. 어제 입원해야겠다고 찾은 그녀와는 달리 부모가 며칠 보자며 가더니 새벽에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말씀대로 입원을 해야겠어요. 우리가 잘못 판단했습니다. 지난달 죽은 할머니 흉내를 내며 소리를 지르고 남자친구에게 가겠다는 거예요. 잠은 약을 먹고 잘 잤는데 눈을 뜨자마자 헛소리를 합니다.”


바꾸라했다.


어제의 그녀 목소리가 아니었다. 40여 년 전 박사학위논문의 연구대상중의 한 할머니가 갑자기 나타난 듯 굵은 목소리로 “안 돼!“ 하더니 탁 끊어버린다. 정신과에 입원하는 것은 예외일까? 그녀의 전부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나의 의식은 상당히 왜곡되어있어 전인적(全人的) 만남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왜 할머니의 영(靈)이 그녀의 입을 통해 쏟아지고 있는 것일까, ”휙! 휙! 치, 치....“ 이건 분명 예외적 상황이다. 적어도 그녀에겐 그렇다. 빙의(憑依)현상인 것이다.


어린이날이라 했다. 손녀들의 날이다.


예외적 날 예외적 회진을 이미 작정했었다. 어제 집으로 들어가시라는 아들의 권유를 마다하고 그래서 예정대로 6층부터 돌아보기 시작했다. 아침마다 마음의 죽비를 든 의사가 되어 좌선하듯 자신의 침대에 앉아있는 환자와 눈을 맞추며 회진할 때와 달리 조반 후 각자 자유시간의 모습들을 자연스럽게 돌아보는 회진-정확히 회진은 아니다, 눈여겨 두었던 문제의 환자와 자연스럽게 화두를 교환하다 5층으로 내려왔다. 법을 유난히 따지며 사사건건 꼬투리를 잡는 환자, 험한 곳을 수차례 들락거리던 초로(初老)의 어깨를 두드리며 “아침은 잘 했고요...”, “휴일인데 어떻게 오셨어요?”, “걱정이 되서.., 의사인걸...” 씩 웃는 모습으로 화답하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들었지, 눈이 왜 이래?”, “여긴 법도 없어요. 일방적으로 당했어요...”, 두 손을 부딪치는 흉내를 내면서 “잘 잘못을 떠나 소리는 손바닥 하나론 나지 않는 법인데....”. 받아들이는 눈치다.


여자병동 4층으로 내려왔다. 호들갑스런 거실을 거쳐 보호실에서 잠들려는 예외적 빙의(憑依)환자 침대 옆에 앉아 “괜찮지?”, “아주 좋아요. 편해요.”, “그래 그럼 푹 자고......” CCTV가 간호실화면에 뜨고 있는 것을 보며 병실을 둘러본다. 아니 사람들의 눈과 몸짓을 본다. 마주치는 얼굴마다 웃음, <꼬마>라는 별명이 붙은 20대 초반의 여자에게 “잘 잤지? 기분 좋아 보이네!”, “네~”, “오늘 무슨 날? 어린이날 맞지, 봐 이젠 어린이날이 아니라 ‘어른의 날’이 되겠군!” 당사자를 포함 모두가 화들짝 웃는다.


병동을 나오는데 봉지에 아침 안 했을 거라며 뭔가를 들려준다.


한층 내려와 아들의 면담실로 들어가 봉지를 건넸다.


“난 아침을 해결했으니 먹지..... 예외적인 날에 예외적 라운딩이 더 인간적이지.... 치료의 묘미 뭐 그런 거....... 그래 그럼 가마..........”


사실 특별한 날 형식을 떠난 둘러보기 속의 한마디와 몸짓은 죽비를 마음에 품고 대하는 회진이나 면담실의 긴 얘기보다 서로가 서로를 있는 대로 더 잘 볼 수 있는 시간이다. 전부일수는 없지만 몇몇 사람이라도 커다란 만남들이며 그것은 병실분위기에 매우 따스한 웅기로 번져나간다. 스스로가 넉넉해져 좋은 느낌은 진행형이다.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올 때까지 빙의(憑依)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학위논문을 쓸 때와는 사뭇 다른 생각들로 엉킨다. 어린이날 아침 8시 좀 넘어서라 찻길은 확 뚫려있었다. 당연히 규정 속도 이상으로 달려왔다.


아내가 반갑게 맞는다.


“아이들에 전화를 하려 했었어요...”


지난 토요일 이미 어린이날을 위한 메일을 보냈었다. 사진을 올릴 수 있는 곳이 집이기 때문이다. 병원이나 아들집에선 자료가 없기에 UBS로 옮겨다 날 맞추어 보낼 수도 있지만 오늘 다시 전화를 넣기로 한 것이다. 꽁초 아줌마의 등 가방은 그녀의 아이로 넘어갔을까? 어떤 만남이었을까.



언젠가 어린이공원 내의 ⌜꼴찌교실⌝이 있어 전임강사를 맡은 적이 있었다. 꼴찌가 예외라 생각된다면 1등도 예외일 것이다. 손녀들은 예외인가.


예외적 휴일에 예외적 만남들을 통해 예외적 대화를 얻으며 동시에 예외적 광경과 막 닥쳐 결국 예외라 불리는 것들을 보면서 일상과 차별성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그것은 하나가 아닐까하는 느낌이다. 보는 사람의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일 뿐인 듯싶다.


“여기 돌 하나를 가지고 왔어요. 자, 봐요! 그냥 돌이죠? 이쪽을 볼까요? 어때요 빛나는 파란빛, 멋지죠? 이건 분명 돌이지만 그 속 어딘 가엔 보석 같이 빛나는 모습이 있어요. 여러분, 꼴찌는 꼴찌가 아니죠. 파란 보석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사람마다 자기 색깔이 있는 것을 스스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겠죠.............”


시드니 부루 마운틴 오팔폐광에서 사온 광석이 주는 의미는 바로 천재와 바보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 자체도 없을지 모른다고 암시한다. 진대지(塵大地)! 그렇다고 자신에게 분명히 존재하는 광채를 진흙에 맡겨둘 이유는 없을 것이다. 둘째 손녀는 할머니의 생일에 첼로를 들려주었다. 언니를 따라갈 정도라 했다. 보는 시각과 자신의 갈고 닦는 모양의 차이임을 어린이날 창작동요에서 본다.


“할아버지 사랑해요, 건강하세요. 여름에 만나요 할아버지!”


“오늘 저녁은 할아버지가 사주는 거니까 근사한 외식을 하도록 하렴...”


“그렇게 할게요. 건강하세요. 아버님!”



예외적으로 귓가에 첼로선율이 지워지지 않는다. 그것은 일종의 광석의 빛과 같은 것일 거다. 분주한 꽁초아줌마가 그녀의 아이와 가질 어린이날 속에 꽁초를 던진 그 당당한 남자의 아이들은 어떤 만남이 될지 궁금해진다. 거기에도 예외는 있을 수 있겠지? 어떤 예외일까?


경쟁적으로 어린이의 순백을 통해 때묻은 어른의 심성을 씻어볼까 TV에선 예외적으로 요란하다. 취지와는 달리 오히려 어린이들이 예외적으로 연극적 로봇이 될까 두려운 형편이라 꽁초아저씨의 아이들과 더불어 정말 바람직한 예외적 현상을 기대해도 될 수는 있는 것일까? 예외는 또 다른 예외를 불러일으킬 것이 분명한데....... 두렵기 만하다.                                          (2010.5.5. 어린이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