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수필
게시판 > 수상수필
기하학적 인생 오차 덧글 0 | 조회 17,215 | 2010-08-08 00:00:00
정동철  



기하학적 인생 오차


2010.8.7.


정 동 철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는 복중이다. 40도를 육박한다는 열기에 방온복(防溫服?)-이런 표현은 없겠지만, 도 없이 베란다에서 더위를 무시한 채 유리조각을 주어내고 있다. 기온에 유난스런 짜증은 온대간대 없다. 베란다 타일바닥을 안전하게 치워야 하는 일이 더 급해진 이유다. 아내가 여차하면 다칠 유일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주중 내내 혼자 사는 아파트 그중에 부엌 베란다는 아내의 가장 큰 생활공간에 해당된다. 거기 소주병이 떨어져 박살난 유리조각이 구석구석 흩어진 까닭이다.


플라스틱 함지박의 물을 휙 쏟아 부어 하수구로 유리조각들을 몬다. 때마다 한 두 개씩 나온다. 파란 유리조각은 아주 날카롭고 작다. 작고 날카로워 엄지와 검지로 잡을 수가 없다. 검지로 눌러 물의 흡착력을 이용해 플라스틱 봉지에 털어 넣는다. 원래 파란 색이었지만 날카롭게 길게 조각난 것들은 색도 없다. 육감으로 계속 검지를 이용한다. 제법 시간이 걸렸다. 후끈거리던 더위는 어디론가 살아졌다.


문득 예나 지금이나 반세기 이상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나의 성품은 여전히 변한 게 없다는 것을 알았다. 참으로 힘든 것이 마음먹기라 여긴다. 더위를 잊은 것은 소득이다. 십 수 년 전 직지사(直指寺) 묵언(黙言)수행을 다녀와 피곤한 몸으로 서제에 에어컨을 틀어놓고 컴퓨터를 보다 잠시 침실에 누웠다가 그만 잠들었던 기억이 솟는다. 그때 나는 분명 서제의 에어컨 바람에 시원스레 잤다고 여겼다. 아침에 눈을 뜨니 닫아놓은 서제의 에어컨은 속절없이 돌아가고 막상 침실의 에어컨은 조용했다. 푹푹찐다. 몰아일체(沒我一切)에 이르면 유난히 덥다는 복중 여름도 별게 아니려니 피식 웃음이 터진다.


거실의 에어컨은 원래 아내가 싫어한다. 체감온도의 격차가 큰 탓이다. 닷새 만의 온 남편의 더위를 위해 참는 아내의 심정을 모른 채 열기를 식히고 있던 내가 체온에 근접한 외기에 노출된 부엌베란다에서 전연 더위를 느낄 여지조차 없이 유리조각에 열중하고 있다는 것은 결국 마음먹기와 통한다는 의미다. 물리적으론 해석이 안 되는 감각기관의 화학적 오류다. 감각기관이 더위를 읽지 못하니 말이다.



오류의 발단은 정확히 말해 평상심을 잃은 대서 시작된 것이다.


아들의 병원에서 5일 만에 와 아내는 나름대로 정성껏 준비한 저녁이 다 됐다 했다. 몇 차례의 신호가 왔다. 거실 소파에서 마침 다음 주 환자를 위한 강의제목이 번개처럼 떠올라 정리하고 있을 때다. 토스토에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얘기를 5층에 있는 환자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온 친구를 위해선 적당하다는 일념으로 대충 윤곽을 잡고 식탁에 않았을 때 아내는 이미 삐져있었다. 잘 몰랐지만 맥주를 마시면서 혹시 강릉으로 가겠느냐 질문을 던지자 그 응답에서 알아차린 것이다. 대체 정성 것 준비한 저녁을 그렇게 박대할 수 있냐는 것이다. 전연 그것이 아닌데, 글 쓰는 나의 모습을 처음 본 것도 아니고 몰라준다싶어 나는 나대로, 그러나 그러려니 맥주와 소주병-남아있던 것,을 섞어 돼지고기와 함께 비웠다. 오간 얘기 뒤 아내를 위해 식탁 정리를 거든다고 깡통 2개와-하나는 아내가 마신 것, 소주병을 분리수거 박스에 넣으려 했다. 유리병이 있어 혹시 하면서 베란다로 나갈까말까 하다-행여 바닥에 떨어지면 산산 조각날 것이 뻔해 망설, 이다 더우니 예의 방식으로 베란다 문을 열고 깡통 2개를 차례차례 김치냉장고 위에 굴려 분리수거 박스에 넣었다. 정확했다. 이어 소주병을 같은 형식으로 굴렸다. 김치냉장고위로 굴리면 바로 그 끝에 박스로 떨어지게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주병은 박스로 들어가지 않고 옆으로 흘러 바닥에 떨어졌다. 여지없이 산산조각 박살나고 말았다. 그 후유현상은 장난이 아니란 것을 아는 나는 즉시 베란다로 나갔다. 주어 담았다. 커다란 것은 그랬지만 잔잔한 것은 비로 쓸어야 할 형편이다. 마침 비닐봉지가 보여 대신 활용했다. 흩어진 유리들을 모았다. 그때 오른쪽 새끼손가락에서 순간적으로 피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꽉 쥐고 멎겠거니 그러나 아니다. 결국 아내를 불러 베란다로 통하는 창문으로 일회용 밴드를 부탁했다. 여전히 옆으로 새어나온다. 다시 덧붙이고 겨우 봉한 다음 본격적으로 물을 이용해 흩어진 유리알을 찾기 시작했다.


제법 긴 시간이다. 불현듯 때에 60여 년 전의 쌀알이 어른거렸다. 대학시절 왕십리 연탄공장 옆에 살던 집이 연상(聯想)의 스크린에 떠오른 것이다. 중앙시장에서 쌀을 짊어지고 집으로 옮기고 있었다. 전차에서 바라보이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으로 치미는 화를 견디다 못해 집에 도착하자마자 툇마루에 어께에 맺던 쌀자루를 내렸다. 아마 메다 꼰 졌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을 것이다. 순간 쌀자루가 터졌다. 아연 봉당에 깔려있던 연탄가루와 뒤섞이니 후회는 차치하고 기가 찼다. 난감함이라니. 연탄가루에서 쌀을 고른다는 것은 전차에서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나뒹군 것-것도 내 자격심일 뿐, 이상의 낭패로 번진 것이다. 평상심은 아주 먼 곳으로 화가 터진 결과다. 지금 베란다의 유리조각에서 유사한 느낌이 재생되고 있다. 화의 대가인 것이다.


결국 ⌜기하학적 인생의 오차⌝라는 생각이 튕겨져 나왔다. 소주병이 맥주깡통처럼 완전한 원통형이라 여겼지만 그것은 아니었다. 뿐인가 냉장고 위에서 굴린 힘의 오차로 휘어진 것이 바로 오류다. 그러나 정작 문제의 핵심은 감정의 기하학적 오차에 의한 것이 명백하다. 공간의 수리적(數理的) 성질을 연구하는 수학의 한 분야는 나의 지정의(知情意) 3차원 마음에 그대로 적용된 셈이다. 특히 미분위상기하학(微分位相幾何學, Differential Topology) 즉 미분 가능한 다양체의 미분동상 사상(微分同相 寫像)으로 볼 때 연속(連續)사상(寫像)을 조사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인 것처럼 미분 가능한 정서상의 사상(寫像)이 문제의 핵심이라는 점에서 딱 들어맞는 것이 아닌가 한다. 지정의(知情意)로 기억된 지난날들이 미분동상 사상(寫像)에 오차가 발생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이것은 일시적 노화현상에 의한 것이 아니다. 연속선상의 문제로 진행형이 되고 있는 것이 나의 현실이라는 뜻이다. 평상심(平常心)이라니 준비된 일상은 가당치도 않다.


강릉 얘기는 내 딴에는 아내를 생각하며 장차 병원을 그만둘까하는 미묘한 의중의 표현으로 시작된 것인데 아내는 자신의 존재가 무시되고 있다는 입장으로 해석되어 5일 만에 만난 노부부간의 감정이 기하학적으로 뒤틀리게 되었다. 단순히 소주병의 접속(接續) 곡률(曲律) 또는 측지선(測地線)과 같은 기초적 오차에 의해 발생한 오류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붓고 또 붓는다. 내 딴에는 말끔히 치었다고 여기고 있지만 유리조각이 어디에 숨어있을지 모른다. 아내는 뒷맛이 좋지 않은지 침실로 들어갔다.


인생에서, 말하자면 인간관계에서 더구나 내년이면 금혼식이라는 반세기의 동고동락(同苦同樂)을 통해서도 그놈의 미분위상기하학의 정서적 오차는 수학적으로 결코 정답이 나오지 않을 모양이다. 하물며 정신과 환자를 치료한답시고 면담이나 집단치료를 위한 강의에 정성을 담지만 알아들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답답하고 착잡하다. 때에 전화가 울렸다. 열애중의 아들과 얽혀있는 답답한 실타래를 어찌해야할지 모르는 어떤 노모가 말한다.


“어쩌면 좋지요? 도무지 방법이 서질 않네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니 정말 답답합니다..... 결혼생활이 잘 될까요?”


나의 오차도 실은 아들과의 엎치락뒤치락 오가는 감성의 꼬임이 뒤섞인 문제가 발단의 요인일수 있다. 아버지의 사회적 권위로부터 최대한의 소득을 올리면서-선의의 개념이나, 나의 지출을 최대한 제한하려는 제도(?)가 작동하는 가운데 그를 위한 나만의 깊은 뜻은 미명에 묻혀버리고 말 것 같아서다. 그 결과를 확인하기까지가 답답하다는 것이다. 결국 오늘 만 1년 전 아들을 위해 내려놓은 손목시계를 꺼냈다.(아들을 위해 나의 시간을 접기로 자청하였고, 결과 禮 이상의 상식을 넘는 넉넉한 배당을 받아왔다.) 예상보다 훨씬 앞서 만족스런 성공에 이르렀기에 이제 나의 몫은 끝났다는 입장이다. 잠복됐던 나의 시간을 찾아 쓰려고 자선냄비의 구세군종을 흔들 듯 태업을 감으며 시간을 맞추려 만지작거린다. 그러나 미분(微分) 위상 기하학적 오차현상은 쉬지 않고 이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2010년8월7일 오전 10시6분, 정확하게 1년 만이다. 일 년간 아들을 위해 쓴 시간의 표시다. 이심전심(以心傳心) 기하학적 오차는 피할 수 없는 걸까. 뿌듯한 가운데 나의 뜻과는 다를 수밖에 없는 아쉬운 심정은 어쩔 수 없다. 토스토에프스키로 시작된 ⌜나에게 남은 시간⌝은 여명(餘命)과 포개지다보니 더욱 그렇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사랑이 고귀하게 강조되고 톨스토이의 사랑 또한 절절한 점엔 전연 이의(異意)가 없다. 모스크바 톨스토이 석상(石像) 현장에서 확인했던 사어(死語)가 된 그 사랑을 복원한다는 것은 그러나 적어도 나의 현실에선 풀리지 않는 숙제로 엉킨 오류만이 진행된다. 아내나 아들 모두에게 동전앞뒤감정이 제로가 될 수 없다는 결과다. 과욕이겠지?


착오라면 당연히 수정해야 할 대상이건만 그것이 이성(理性)대로 되지 않는 다. 인간의 속성인가. 오장육부 심신에 뜸을 푹 들여 봐야할 형편이나 무엇보다 우선 ⌜인생, 기하학적 오차⌝에 대한 전문적 해법을 모른다는 점이 가장 안타깝다.


부엌베란다의 유리조각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완벽하게 정리되었을까? 아내의 발에서 피가 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랬으면 정말 좋겠다. 이젠 제발 단순해 질수 없을까. 복잡한건 싫다. 수사학적 척은 더욱 지겹다. 나의 시계가 죽지 않고 작동하면 그것으로 족하리라. 아내가 권한다.


“그만하세요. 나 거기 맨발로 나갈 일 없는데 걱정하지 말라 구요. 들어와요. 여기 수박..... 시원한 수박 좀 드세요......”


아들의 맑고 환한 표정이 스쳐간다. 백화점 여자마네킹 치마를 들 춰 민망스럽게 속을 들여다보던 녀석이 장난감코너에서 방방거리며 어쩔 줄 몰라 했던 그 해맑던 어린모습이 찐하게 겹친다. 왜지? 오차의 결과일까? 홀로 병원을 지켜야하는 부전자전 정신과의사의 내일 일요일은 말복인데..............